신문명과 구국운동의 중심-정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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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문 앞 3·1운동만세시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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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1일 오후 3시경 수많은 학생과 시민이 운집한 가운데 독립연설을 하고 만세시위를 벌인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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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재학당 기숙사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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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4일 오전 한위건을 비롯한 서울 시내 전문학교 학생대표와 중등학교 대표들이 모여 3월 5일의 남대문역전 학생단 독립만세시위를 준비한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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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문출판사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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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8년 배재학당의 벽돌교사 반지하의 산업부실에 설치된 인쇄소로『협성회보』와『독립신문』등을 인쇄한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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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교회 이필주 사택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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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1운동 거사 준비를 위해 학생 대표 및 기독교계 대표들이 회합을 가졌던 이필주 목사의 사택이 있던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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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운궁 중명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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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11월 17일 밤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대신들을 회유 협박해 을사늑약을 체결한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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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탁호텔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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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친미개화파가 중심이 되어 구성된 정동구락부와 그 후신이라 할 독립협회의 주요 모임 장소였던 손탁의 사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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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러시아 공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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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2월 11일 아관파천 이후 1897년 2월 20일 경운궁으로 이어하기까지 고종이 머무르며 국사를 보았던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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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로 안내

탐방로 정보목록
지역 서울특별시 코스형태 도보 총 소요시간 약 130분
함께 갈 만한 곳 덕수궁, 서울시립미술관, 배제역사박물관, 신아기념관(등록문화재 402호), 정동극장, 유관순 우물(이화여자고등학교 내)

탐방 목적

덕수궁 주변 아관파천, 경술국치 관련 사적지와 3·1운동의 중요한 거점이었던 초기 감리교 선교센터지역을 중심으로 서구열강의 침입과 구국운동의 의미를 살펴본다.

코스 개요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계비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의 능인 정릉(貞陵)이 현재의 정릉동으로 옮겨가기 전에 있었던 것에서 유래한 정동은 19세기 말, 개항 이후 정치의 1번지이자 교육문화 및 기독교 선교의 1번지였다.
덕수궁(경운궁) 주변 정동 지역은 청·일 양국을 포함한 구미 각국의 외교장이 되었다. 이 일대를 중심으로 각국 영사관 건물이 다투어 들어섰는데 당시 서울에 있던 9개 외국 공관 중 미국, 영국, 러시아, 프랑스, 벨기에 등 5개 공관이 정동에 위치하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정동은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아관파천, 독립협회 활동, 대한제국의 성립 등 한국의 민족운동이 국민통합을 통한 근대국가의 건설로 이어지는 역사적 현장의 주무대가 되었다. 또한 이곳에 위치한 중명전은 1905년 일제에 의해 외교권이 강탈된 을사조약의 현장이기도 하였다.
한편 정동은 일찍부터 감리교 선교사들이 선교거점을 마련한 곳이기도 했다. 이곳에 위치한 선교사들의 저택과, 교회, 학교 등을 중심으로 서양식 복식, 음식, 주택 등이 소개되었다. 특히 선교사들이 중심이 되어 세운 학교인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에는 신식 교육을 받고 독립정신을 고취시키고자 하는 학생들로 붐볐다. 이러한 전통은 3·1운동까지 이어져 이화학당의 유관순 같은 인물들의 활동 또한 이곳 정동을 배경으로 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