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정동교회 이필주 사택 터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3·1운동 |
| 종류 | 가옥 |
| 상태 | 멸실 / 문화재 예배당 앞뜰 50주년 기념비가 들어서 있다. |
| 정의 | 1919년 3·1운동에 앞서 제2회 및 제3회 학생단 간부회와 기독교계 대표자회의가 열렸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1919.2.25. 학생단 제2회 간부회 개최/1919.2.26. 학생단 제3회 간부회 개최/1919.3.1 3·1독립만세운동 |
|---|---|
| 관련 조직 | |
| 관련 인물 | 이필주(李弼柱)/이묘묵(李卯黙)/이병주(李秉周)/이승훈(李昇薰)/함태영(咸台永)/손정도(孫貞道) |
| 관련 내용 |
정동교회 내 이필주(李弼柱, 1869~1942) 목사 사택은 1919년 3·1운동에 앞서 2월 25일 학생단 제2회 간부회와 26일 제3회 간부회, 그리고 28일 밤 중등학교 학생대표들에게 독립선언서를 배부하기 위한 모임이 열린 장소이다. 학생단 주도의 대대적인 만세시위가 있었던 3월 5일에는 연희전문학교 2년생 이묘묵(李卯黙)이 학생YMCA 회장 이병주(李秉周)의 지시로 이곳 사랑방에서 『독립신문』을 등사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2월 27일 정오 이승훈(李昇薰)·함태영(咸台永)을 비롯한 기독교계 대표들이 모여 기독교 측의 민족대표 인선을 마무리짓고, 독립선언서와 청원서의 내용을 검토한 장소이기도 하다. 이필주 목사는 대한제국시기 시위대 부교를 지낸 군인으로, 1903년 세례를 받고 상동교회 입교인이 된 뒤 군대를 퇴직하고 상동청년학원과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YMCA) 등에서 체육을 가르치며 교육구국운동의 대열에 가담하였다. 1907년 감리교 협성신학교에 들어가 신학교육을 받았으며, 목사가 되어 1918년 손정도(孫貞道) 목사 후임으로 정동교회를 담임하면서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
| 참고 문헌 |
「김형기 등 210명 예심종결결정」, 1919년 8월 30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5, 1972, 12~20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13, 1977, 99~100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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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성부 정동 34 |
|---|---|
| 주소 | 서울 중구 정동 34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김형기 등 210명 예심종결결정」 및 『독립운동사자료집』 5권에 따르면, 3·1운동 당시 이필주는 경성부 정동 34번지 정동교회 구내 목사 사택에 거주한 것으로 되어 있다. 정동교회 옛 사진 등에 근거해 볼 때 당시 사택의 위치는 문화재 예배당 앞뜰 아펜젤러 목사 흉상과 50주년 기념비가 서있는 주변으로 추정된다. |














1900년대 초의 정동교회
이필주가 시무하던 정동교회
이필주
정동교회 본당에서 본 이필주 사택 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