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옛 러시아공사관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등급분류 제외(항일운동) |
|---|---|
| 운동계열분류 | 한말구국운동 |
| 종류 | 건물 |
| 상태 | 훼손 / 6·25전쟁 때 크게 파손되어 현재는 탑옥 부분만이 남아있다. |
| 정의 | 1896년 2월 11일 아관파천 이후 1897년 2월 20일 경운궁으로 이어하기까지 고종이 머무르며 국사를 보았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1896 아관파천 |
|---|---|
| 관련 조직 | |
| 관련 인물 | 이윤용(李允用)/고종/이범진(李範晉)/이완용(李完用) |
| 관련 내용 |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에게 시해당한 후 고종은 일본과 친일내각에 포위된 채 경복궁에서 불안한 나날을 보내야 했다. 그러자 친미·친러 세력은 이를 기회로 고종을 궁밖으로 탈출시켜 친일정권을 타도할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1895년 11월 28일(음력 10.12)의 ‘춘생문사건(春生門事件)’이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고 말았다. 이후 고종 측근의 이범진(李範晉)과 이완용(李完用)·이윤용(李允用) 등은 러시아 공사 베베르(K. I. Waeber) 등과 모의하여 국왕을 탈출시킬 계획을 다시 세우고 고종의 윤허를 받았다. 그리고 1896년 2월 11일 새벽 전국적인 의병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중앙의 친위대 병력까지 동원된 틈을 타 러시아공사관으로 파천을 단행하였다. 궁녀들이 타는 가마에 몸을 감추고 경복궁을 빠져나온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에 도착한 뒤 경무관 안환을 불러들여 김홍집을 비롯한 친일내각 대신들에 대한 포살령(捕殺令)을 내리고, 새 정부를 발족시켰다. 이후 고종은 1987년 2월 20일 경운궁으로 이어하기까지 1년 동안 러시아공사관에 머무르며 국사를 처리하였다. 아관파천(俄館播遷)의 역사 현장인 러시아공사관은 1890년에 건립한 르네상스풍의 2층 벽돌 건물로 러시아인 사바틴(H. N. Sabatin)이 설계를 했다. 해방 후에는 소련영사관으로 사용했으며 6·25전쟁 때 크게 파손되어 탑옥부분과 지하 2층만이 남았다. 1973년에 현재의 모습대로 복원하고, 1981년에 다시 주변의 조경과 보수공사를 실시하였다. |
| 참고 문헌 |
『고종시대사』4, 1896년 2월 11일조, 국사편찬위원회, 1970, 36쪽. 車相瓚, 「李太王俄館播遷事件 丙申二月大政變記, 建陽元年 2월 11일」, 『별건곤』 19, 1929, 6~10쪽. 이경재, 『서울정도 육백년』 1, 서울신문사, 1993, 116~123쪽. 「최신경성전도」(1907);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지도』, 2006, 28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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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
|---|---|
| 주소 | 서울 중구 정동 15-3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최신경성전도」(1907)에 해당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














옛 러시아공사관
옛 러시아공사관 주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