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조동호 집터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사회운동 |
| 종류 | 가옥 |
| 상태 | 멸실 / 현재 슈퍼마켓과 음식점, 카센터가 주변에 들어서 있다. |
| 정의 | 1924년 동아일보 기자로 재직할 당시 조동호가 살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
|---|---|
| 관련 조직 | 신한청년당/대한민국임시정부/동아일보사/한중호조사/한국노병회/조선공산당/조선건국동맹 |
| 관련 인물 | 여운형(呂運亨)/장덕수(張德洙)/김규식(金奎植) |
| 관련 내용 |
조동호(趙東祜, 1892∼1954)는 충북 옥천 출신으로 1908년 측량학교에 입학해 1910년 수료하였는데, 이때 여운형과 사귀게 되어 함께 중국으로 건너가 1914년 난징[南京] 금릉대학에 입학하였다. 1918년 8월 상하이[上海]에서 여운형·장덕수 등과 신한청년당을 조직하고, 김규식을 파리평화회의에 대표로 파견하였다. 1919년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될 때 임시의정원 의원에 피선된 뒤 『독립신문』 기자, 한중호조사 간사, 한국노병회 간부 등을 역임하였다. 1923년 말 귀국해 『동아일보』 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활동하면서 1925년 조선공산당 결성에 참가해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 그는 코민테른의 승인을 얻기 위해 모스크바에 파견되었다가 상하이로 돌아와 조선공산당 상해지부에서 활동하던 중 1928년 2월 일본영사관 경찰에 붙잡혀 4년간 옥고를 치렀다. 1932년 11월 출옥 후 여운형이 사장으로 있는 『조선중앙일보』 논설부 기자로 활동하면서 조선공산당재건운동을 벌이다가 1934년 1월 다시 일제 경찰에 검거되어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1944년 8월 여운형과 함께 조선건국동맹을 조직하고, 선전부장으로 활동하였다. 200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
| 참고 문헌 | 「공산당원 취조상황에 관한 건」, 1924년 10월 3일, 『검찰행정사무에 관한 기록 2』;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좌표를 클릭하시면 '길찾기'로 연결됩니다.
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성부 익선동 58-3 |
|---|---|
| 주소 | 서울 종로구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공산당원 취조상황에 관한 건」에 해당 주소지가 기록되어 있다. |














조동호
조동호 집터
법정으로 들어가는 조동호( 『동아일보』, 1927년 9월 12일)
「京鍾警高秘 제12075의 3호 : 공산당 취조상황에 관한 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