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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이강년 의병부대 전투지 - 영춘면 남천리·상리 일대

기본정보

기본정보
사적지 분류 국내항일운동사적지
운동계열분류 의병전쟁
종류 산야
상태 변형 / 산야이지만 도로가 포장되어 변형되었다.
정의 1907년 9월 25일 이강년 의병부대가 일본군과 전투를 치른 곳

관련정보

관련정보
관련 사건
관련 조직  
관련 인물 이명상(李明相)/원건상(元建常)/조동교(趙東敎)
관련 내용 1907년 8월 충주성 공격에 실패한 이강년 의병부대는 경북 문경으로 이동하였다. 이곳 문경지역에서 이강년 의병부대는 9월 중순까지 조령·갈평·적성 등지에서 전투를 치렀다. 이후 이강년 의병부대는9월 18일 충북 단양을 거쳐 영춘으로 이동하였는데, 당시 영춘읍내는 일본군의 방화로 참혹한 상태였다.

이강년 의병부대는 영춘향교에 마을 집강을 모아 군수물자를 확보하는 한편, 이명상(李明相)과 합진했다. 그리고 강원도 삼척으로 가서 의병을 모집한 소모장 원건상(元建常)이 도착함에 따라 병력을 증가시킬 수 있었다. 또 문경지역에서 일시 합진하였던 청풍 의병장 조동교(趙東敎) 부대도 합진을 원하여 함께 주둔하였다.

병력이 증가한 가운데 이강년 의병부대는 9월 24일 영춘 남천리 쪽으로 이동하였다. 그런데 다음날인 9월 25일 일본군 병력이 순흥 쪽에서 다가온다는 정보가 있었다. 이에 이강년은 1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남천리 느릅재[楡峙] 쪽으로 나아갔고, 조동교(趙東敎) 부대에게는 향교(영춘면 상리 461번지) 앞 산록 쪽으로 나아가 협공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미 영춘향교에 도착한 일본군은 길가의 골짜기에서 사격을 가해 왔다. 이에 맞서 의병들도 산위에서 응사하였지만, 탄환이 미치지 않는 형편이었다. 1시간 정도의 접전 끝에 이강년 의병부대는 날이 어두워져서 성골(남천리 성곡)로 퇴각하였다. 의병과의 교전에서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한 일본군은 읍내에 들어가 하리 쪽의 시장에 불을 지르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 전투 이후 이강년 의병부대는 강원도 영월로 이동하였다.
참고 문헌 『대한매일신보』, 1907년 10월 5일, 3면 3단,「지방소식」.
『황성신문』, 1907년 10월 5일, 2면 5단,「지방소식일통」.
「운강선생창의일록」,『운강집』전, 내제문화연구회, 2007, 380-381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1-의병항쟁사자료집, 1971, 236-237쪽.
구완회,『한말의 제천의병』, 집문당, 1997, 295-296쪽.
이종립,『단양독립운동사자료집』, 단양문화원, 2004, 284쪽.

지역정보

지역정보
당시 주소 충청북도 영춘군 군내면 남천리·상리
주소 충북 단양군 영춘면 남천리 느릅실 산10·상리 461
도로명 주소
위치 고증 「운강선생창의일록」(『운강집』전)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의병전투의 특성상 넓은 지역을 아우르고 있는데 단양군향토사연구위원인 지성룡이 현지조사에서 각 지역의 위치를 증언하여 현장을 확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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