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이강년 의병부대 피습지 - 용소동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의병전쟁 |
| 종류 | 산야 |
| 상태 | 변형 / 마을 입구에 200년 된 느티나무(보호수)와 보발마을자랑비가 있으나 당시의 모습은 확인할 수 없다. 보발마을자랑비(1992)에 의병활동 사실이 기재되어 있으나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다. 2008년 조사 당시와 큰 변화는 없다. |
| 정의 | 1907년 5월 이강년 의병부대가 숙영하다가 일본군의 습격을 받은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용소동 의병전투 |
|---|---|
| 관련 조직 | 이강년 의진 |
| 관련 인물 | 이강년(李康秊), 김상태(金尙台), 원도상(元道常), 조준원(趙浚元), 정두원(鄭斗源), 신태원(申泰元), 조동기(趙東冀) |
| 관련 내용 | 이강년은 1896년 1월 경북 문경에서 처음 거의하여 1896년 7월 해산한 이후 1907년 3월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제천에서 재봉기하였다. 그리고 영춘 출신 의병 김상태와 연합하여 영춘면에 주둔하였다. 1907년 5월 27일(음력 4월 16일) 이강년이 원주・횡성・강릉 등에서 뜻을 같이 할 동지를 모아 포군들을 이끌고 영춘의 용소동에서 원도상을 만나 지원을 받기 위해 숙영하던 중에 의병부대의 움직임이 일제에 탐지되었다. 조준원 등 영춘 순검 및 일본수비대의 야습을 받고, 수비대의 습격에 놀란 포군들은 흩어졌다. 야습으로 인해 이강년도 왼쪽 뺨과 팔뚝에 큰 부상을 입고 인근의 성금촌(成金村)으로 들어갔다. 용소동 전투에서 부상을 입은 이강년은 원도상에게 기별하여 지원을 받는 한편, 한동안 정두원, 신태원, 조동기 집에 머물며 치료에 전념하면서 일제의 감시를 피해 은둔하였다. |
| 참고 문헌 |
「이강년 판결문」(1908년 9월 22일, 경성공소원). 「김상태 판결문」(1911년 8월 4일, 대구지방재판소형사부). 「김상태 판결문」(1911년 8월 31일, 대구공소원형사부). 「운강선생창의일록」,『운강집』전, 내제문화연구회, 2007, 358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1-의병항쟁사자료집, 1971, 220-221쪽. 구완회,『한말의 제천의병』, 집문당, 1997, 274쪽. 구완회, 『영원한 의병장 운강 이강년』, 지식산업사, 2015, 42~43쪽. 박민영, 『의병전쟁의 선봉장 이강년』, 역사공간, 2017, 79~84쪽. 박정수・강순희 편, 구완회 역, 『국역 창의사실기』, 다운샘, 2014, 31~34쪽. 이종립,『단양독립운동사자료집』, 단양문화원, 2004, 46쪽. 구완회, 「단양 지역의 한말 의병항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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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충청북도 영춘군 군내면 용소동 |
|---|---|
| 주소 | 충북 단양군 가곡면 보빌2리 산18 일대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운강선생창의일록」(『운강집』전)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2008년 조사 당시 단양군향토사연구위원인 지성룡이 현지 조사에서 용소동 위치를 증언하여 현장을 확정하였다. 보발마을자랑비에도 의병 관련 사실이 기재되어 있고, 용소동이란 지명이 남아 있다. |














용소 의병전투지 전경
용소동 입구
용소 의병전투지 원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