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전좌한 생가 터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의열투쟁 |
| 종류 | 가옥 |
| 상태 | 멸실 / 전좌한의 생가는 멸실되었고, 그 자리에 다른 주택이 들어서 있다. 집 입구에는 “독립운동가 전좌한”이라는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었다. 2008년 조사 당시 마을 입구에는 전좌한의 공적이 기록되어 있는 마을자랑비(2006)도 있었지만, 2021년 조사시 도로가 건설되며 이 비석이 철거되었음을 확인하였다. |
| 정의 | 1920년대에 국내외에서 의열투쟁을 벌였던 독립운동가 전좌한이 태어난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
|---|---|
| 관련 조직 | 경성상업실업단(京城商業實業團)/창의단(倡義團)/조선혁명군대본영(朝鮮革命軍大本營) |
| 관련 인물 | 전좌한(全佐漢), 임선재(任善哉), 김응선(金應先), 계의산(桂義山), 유해강(柳海崗), 김봉준(金鳳俊), 신화수(申華秀). |
| 관련 내용 |
전좌한(全佐漢, 1899~1986)은 옥천읍 죽향리에서 출생하였다. 1919년 12월 비밀단체인 경성상업실업단으로부터 그의 조부 전흥규(全興奎) 앞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 군정서 명의의 납세 불납 문서가 도착하자, 그는 임선재(任善哉)와 함께 이 문서를 인쇄하고 배포·게시하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1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고향의 김응선(金應先)과 함께 창의단(倡義團) 단원 계의산(桂義山)을 만나 조선총독부와 시청 등에 폭탄을 투척하고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포고문을 살포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일제 경찰에 탐지되어 실패하고만주로 망명하였다. 1926년 음력 4월 초순, 그는 길림성에 있는 유해강(柳海崗)의 집에 머물면서 비밀결사 조선혁명군대본영(朝鮮革命軍大本營)을 조직하고 4~50명의 단원을 확보하여 군자금 모집, 경고문 인쇄, 배부 및 일제 주요기관 파괴 계획을 수립하였다. 그리하여 1926년 10월 1일 경복궁으로 옮겨 지은 조선총독부 신청사의 낙성식을 기하여 일제 주요기관을 폭파하기로 결심하고, 김봉준(金鳳俊)과 함께 권총과 탄환 및 각종 문서를 가지고 서울로 들어왔다. 그러나 동년 9월 22일 그의 매부 신화수(申華秀)와 동지들과 서울에서 체포되어 1927년 8월 3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31년 3월 26일 출옥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 참고 문헌 |
「五十餘團員과 相應 大規模의 爆破陰謀, 全佐漢一派의 罪狀 전률할 대음모를 계획햇던 내용 ○○革命軍總本營지 組織」,『매일신보』, 1927년 6월 25일. 「倡義團續行公判, 疑問의 主犯全佐漢 그가 밀정인지 안인지가 의문 傍聽席은 如前滿員」,『매일신보』, 1927년 8월 23일. 「충북의 독립운동가열전-전좌한」,『충북일보』, 2015년 7월 19일. 「전좌한 등 2인 판결문」, 1921년 3월 18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김응선 등 판결문」, 1927년 8월 31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10, 1976, 822쪽. 국가보훈처, 『대한민국독립유공자공훈록』 제4권, 1981. 876~877쪽. 박걸순, 「옥천지역 근대의 기억과 독립운동가」,『중원문화연구』24, 2016, 170~171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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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면 죽향리 66-1 |
|---|---|
| 주소 |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 죽향리 34-2(향수3길 57-5)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전좌한 판결문」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으며 현지조사에서 이희목(죽향리 거주, 2008년 조사 당시 79세)의 증언으로 전좌한의 생가지를 확인하였다. 집 앞에 옥천문화원에서 세운 안내판이 있다. |














전좌한 생가 터 전경
전좌한의 고향임을 기록한 죽향리 마을 자랑비
전좌한 생가 터 입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