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송병순 강당 터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애국계몽운동 |
| 종류 | 가옥 |
| 상태 | 멸실 / 학산면 범화리는 상시와 하시로 구분되는데 강당터는 범화리 상시마을에 있었고, 당시 강당 건물은 산을 등지고 동향으로 있었다. 밭으로 사용되다가 주택이 건립되었다. |
| 정의 | 1906년 송병순이 영동군 용화면에 강당을 건립하여 민족교육을 하였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1905 을사늑약 |
|---|---|
| 관련 조직 | |
| 관련 인물 | 송병순(宋秉珣) |
| 관련 내용 |
송병순(1839~1912)의 호는 심석(心石)으로 을사조약에 반대하여 순절한 송병선(宋秉璿)의 아우이다. 1903년 고종이 홍문관서연관으로 임명했으나 친일파의 반대로 등용되지 못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그해 11월 「토오적문」을 지어 전국 유림에게 배포하고 국권회복에 궐기할 것을 호소했다. 1906년에는 충청북도 영동군 학산면 범화리에 강당을 건립하여 제자들에게 민족독립사상을 교육하였다.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나라가 망하자 통분하여 마을 장군바위 등에서 여러 번 자결을 기도했으나 제자들이 말려 실패하였다. 그는 범화리에서 두문분출하며 망국의 슬픔을 시로 달래었다. 1912년 일본 헌병이 소위 은사금을 가져 왔으나 거절했다. 같은 해 2월 29일 일제가 회유책으로 경학원 강사로 천거하자 역시 거절했다. 그리고 유서를 남기고 음독 순국하였다. 그는 「전국 인민에게 고함」의 유서를 남겼다. ‘병선(秉璿)은 초야(草野)에 숨은 사람으로서 문을 닫고 글을 읽어 분수와 의리를 지키고, 세상일의 흥망성쇠에 있어서는 일 맡아 하는 이들을 믿을 뿐이었소. 그런데 지금 국가가 망하게 되고 백성이 다 죽는 날을 당하여 후세를 위하여 태평의 공을 이루지 못하고, 또 당장 엎어지는 백성들을 구원하지 못하니 살아남아서 이런 참혹한 상황을 보고 있는 것보다는 그만 없어져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낫겠으므로 다만 한 번 죽어 국민에게 사죄합니다. 아아, 우리 국민이 이런 경쟁하는 세계를 만났는데 활불(活佛)의 능력이 없고 보니 앞으로 어찌 살아날 것을 믿겠소. 각기 잘들 생각해서 하기 바랍니다. 대저 죽어야 할 데 사는 것은 살아도 죽은 것이요, 죽어야 할 데에 죽는 것은 죽어도 사는 것입니다.(후략)’. 마을 입구에 2007년 9월에 세운 유래비가 존재한다. 정부는 건국훈장 독립장(1977)을 추서하였다. |
| 참고 문헌 |
황현,『매천야록』, 국사편찬위원회, 1971, 524쪽.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료총서』2, 1971, 220~222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7, 1976, 248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11, 1976, 24∼26쪽. 김선기, 「심석재 송병순의 생애와 시 세계」, 『인문학연구』33, 2006, 35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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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충청북도 영동군 용화면 |
|---|---|
| 주소 | 충청북도 영동군 학산면 범화리 978 일대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독립운동사』7권과『매천야록』에 송병순에 대한 기록이 있다. 현지조사에서 여영옥(범화리 거주, 78세)의 증언에 의해 강당 터는 용화면 범화리, 즉 현재의 학산면 범화리 978번지 일대라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2021년 조사에서 이원만(범화리 323-57 거주, 66세)도 같은 내용을 증언하였다. |














송병순
송병순이 자결을 기도한 장군바위
범화리 입구(마을 유래비에 송병순 관련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송병순 강당 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