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군시제사 대전공장 동맹파업지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사회운동 |
| 종류 | 건물 |
| 상태 | 멸실 / 현재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
| 정의 | 1930년대 대전지역의 대표적인 노동쟁의인 군시제사 대전공장 노동자들의 동맹파업이 전개된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1932.11.7~14 군시제사 대전공장 노동자 동맹파업/1935.8.25~26 군시제사 대전공장 노동자 동맹파업/1936.8.17~21 군시제사 대전공장 노동자 동맹파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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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련 조직 | |
| 관련 인물 | |
| 관련 내용 |
일제의 대표적 재벌인 미쯔비시[三井]가 세운 군시제사(郡是製絲) 대전공장은 1930년을 전후하여 충남지역을 경제적으로 지배하고 있었고, 그 과정에서 초과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조선인 노동자들의 희생을 강요하고 있었다. 군시제사 대전공장 조선인 노동자들은 열악한 노동조건과 노동통제에 대해 세차례(1932.11.7~14, 1935.8.25~26, 1936.8.17~21)에 걸쳐 노동쟁의를 일으켰다. 군시제사 대전공장의 노동쟁의는 '조선인 노동자에 대한 차별대우, 임금인상, 가혹한 노동통제'가 원인이었다. 투쟁양상도 단순한 작업거부가 아니라 단식동맹파업, 가두진출, 경찰서 앞에서의 시위 등 적극적이었다. 군시제사 대전공장의 노동쟁의는 당시 고양된 노동자들의 반일의식을 토대로 조직적으로 전개되었으며, 대전지역 사회운동진영과 연합해 전개한 특징을 갖고 있다. |
| 참고 문헌 |
朝鮮總督府 陸地測量部, 『大田一萬分一朝鮮地形圖』, 1928. 『동아일보』, 1932년 11월 14일, 「要求條件 中心으로 會社內에 意見對立, 회사태도 강경으로 경찰도 분개, 해결 막연의 대전 군시」. 『동아일보』, 1935년 8월 27일, 「大田 郡是製絲工 五百餘名 盟罷, 賃金引上과 待遇改善 等 要求, 警察은 女工 十一名 檢擧」. 『매일신보』, 1936년 8월 20일, 「大田 郡是製絲 罷業, 職工側 態度 强硬, 십구일도 파업은 계속 중으로, 경찰당국 철저경계」. 김형국, 「1930년대 군시제사 대전공장의 노동형태와 노동쟁의」, 『중산정덕기박사 화갑기념한국사학논총』, 1996, 961~969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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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충청남도 대전군 대전면 본정 3정목 |
|---|---|
| 주소 | 대전광역시 동구 인동 179-1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조선총독부 육지측량부에서 발행한 「대전지도」(1928, 1:10,000)에 군시제사 대전공장이 표기되어 있어 현재 지도와 대조해 위치를 파악하였다. |














군시제사 대전공장 작업장(1932년)
군시제사 대전공장이 표기된 대전지도(1928년)
군시제사 대전공장 전경(1932년)
제1치수교에서 본 군시제사 대전공장 터 - 현 인동 현대아파트 일대
군시제사 대전공장 동맹파업 관련기사(『동아일보』, 1935년 8월 27일)
군시제사 대전공장 터 - 인동 현대아파트 일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