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영역

  • 지역별
  • 운동별

사적지 찾아보기

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영보정 - 농민운동지

기본정보

기본정보
사적지 분류 국내항일운동사적지
운동계열분류 사회운동
종류 건물
상태 복원 / 당시 영보정 건물은 이후 중수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정의 1932년 6월 영암군 덕진면 주민들이 농민시위를 준비한 곳

관련정보

관련정보
관련 사건 1932 영암농민시위사건
관련 조직 해방운동영암중앙부/영암공산주의자협의회 
관련 인물 김판권(金判權)/곽명수(郭明秀)/유용희(柳龍羲)/최판옥(崔判玉)/최기동(崔基東)/최헌원(崔憲元)
관련 내용 영암군의 농민운동은 1930년 5월 최기동의 지도 하에 곽명수·최헌원 등이 해방운동영암중앙부를 결성하였으나 최기동의 검거와 일제의 방해로 무산되었다. 이후 1931년 10월 곽명수는 김판권·최판옥 등과 함께 합법적 농민조합을 조직하려 하였으나 이 역시 좌절되자 이들은 비밀리에 혁명적 농민조합을 결성하기로 하였다. 이들은 1932년 4월 18일 영암군 덕진면 영보리 뒷산 형제봉(兄弟峰)에서 영암공산주의자협의회를 결성하고 소작인들의 권익투쟁에 나섰다.

같은 해 6월 4일(음력 5월 1일) 영암군 덕진면 영보리 영보정(永保亭)에서 영암리·영보리·노송리 등의 주민 70여 명이 모여 노동절(메이데이) 기념회를 연 뒤 뒷산인 형제봉에서 산유회(山遊會)를 가졌다. 이어 이들은 지주들의 횡포에 대항할 것을 결의하고 적기(赤旗)를 앞세우고 노동가를 부르며 시위행진에 나섰다. 이들은 “일본인은 우리의 논과 밭을 내놓고 이땅에서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치다 99명이 체포되어 73명이 기소되고 67명이 재판을 받았다.

영보정은 연촌 최덕지가 관직에서 물러난 뒤 영암군에 내려와 학문에 전념하면서 사위 신후경과 함께 지은 정자이다. 정자가 황폐해지자 최정·신천익이 현재 위치에 신축·이전하였다.
참고 문헌 「김판권 등 34인 판결문」, 1934년 3월 7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동아일보』 1932년 6월 14일, 「수백농민 산유회 끝에 신소작인을 대거 습격, 영암 장암리 농민데모사건, 백룡산 포위 수색중」.
『동아일보』 1932년 6월 17일, 「영암농민데모사건 50여명을 검거」.
『동아일보』 1933년 7월 6~10일, 「영암농민데모 예심종결서(1~5)」.
조선총독부 고등법원 검사국 사상부, 「전남영암농촌적화사건」, 『사상월보』 4-1, 1934, 13~23쪽,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향토지편찬위원회, 『영암군향토지』, 전남문화사, 1972, 63~64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10, 1978, 228쪽.
전라남도지편찬위원회, 『전라남도지』 8, 전라남도, 1993, 263쪽.
지수걸, 『일제하 농민조합운동 연구』, 역사비평사, 1993, 260·461쪽.
박이준, 「1930년대 영암지방 적색농민조합운동의 성격」, 『한국근현대사연구』 18, 한국근현대사학회, 2001, 184~189쪽.

*좌표를 클릭하시면 '길찾기'로 연결됩니다.

지역정보

지역정보
당시 주소 전라남도 영암군 덕진면 영보리
주소 전남 영암군 덕진면 영보정길 10-8(영보리 296)
도로명 주소
위치 고증 「김판권 등 34인 판결문」과 『동아일보』 1933년 7월 6일자 등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현재 영보정이 남아 있고, 그 뒷산이 지금도 형제봉이라 불리고 있어 당시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하단영역

관련사이트

주소: 31232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독립기념관로1  전화: 041-560-0405 팩스 : 041-560-0426 
 Copyright 2021 THE INDEPENDENCE HALL OF KOREA All rights reserved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