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메뉴 영역

  • 지역별
  • 운동별

사적지 찾아보기

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남대문역 광장 - 강우규 의거지

기본정보

기본정보
사적지 분류 국내항일운동사적지
운동계열분류 의열투쟁
종류
상태 부분변형 / 도로 확장과 역사 신축 등으로 주변 경관이 일부 바뀌었다.
정의 1919년 9월 2일 사이토 마코토[齊藤實] 신임 조선총독 부임 행렬에 폭탄을 던진 강우규의 의거가 있었던 곳

관련정보

관련정보
관련 사건 1919.9.2 사이토 조선총독저격사건(강우규 의거)
관련 조직 노인동맹단 
관련 인물
관련 내용 강우규(姜宇奎, 1855~1920)는 평안남도 덕천 출생으로, 1911년 북간도로 망명해 연해주를 넘나들며 지사들과 교류하다가, 길림성 요하현(遼河縣)에 자리를 잡고 학교와 교회를 세워 독립정신을 고취하는데 힘썼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강우규는 64세의 노구를 이끌고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으로 건너가 노인동맹단에 가입한 뒤, 조선총독을 주살할 계획을 세우고 폭탄 한 개를 구입해 국내로 잠입하였다.

1919년 8월 하순경 신임 조선총독의 부임소식이 전해지자 강우규는 거사 장소를 남대문역으로 정하고, 9월 2일 오후 5시경 남대문역 귀빈실을 나와 부인과 함께 대기 중이던 쌍두마차에 오르는 사이토 마코토[濟藤實] 신임총독을 향해 폭탄을 던졌다. 폭탄의 위력이 강하지 못해 목표물인 총독을 주살하는 데는 실패하고, 근처의 신문기자를 비롯한 30여 명이 중경상을 당했다. 거사 뒤 현장에서 빠져나와 재차 의거를 모색하던 중에 9월 17일 체포되어 1920년 2월 25일 사형 선고를 받고 같은 해 11월 29일 서대문감옥에서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참고 문헌 「강우규 공적조서」,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동아일보』, 1921년 12월 20일, 「南大門驛 假移轉, 명이십일일에 가역사로 이전」,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서울육백년사』4, 서울특별시, 1981, 89~92쪽.

*좌표를 클릭하시면 '길찾기'로 연결됩니다.

지역정보

지역정보
당시 주소 경성부 봉래정 2정목
주소 서울 중구 봉래동2가 122, 서울역 광장
도로명 주소
위치 고증 강우규 의거 당시 남대문역의 위치는, ‘국제 규모의 신역사 착공에 앞서 역사를 임시역사로 이전한 뒤, 기존 역사는 헐고 신역사 건축에 착수할 터’라는 『동아일보』1921년 12월 20일자 기사를 통해, 현재의 구 서울역사와 같은 장소였음을 알 수 있다.

하단영역

관련사이트

주소: 31232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독립기념관로1  전화: 041-560-0405 팩스 : 041-560-0426 
 Copyright 2021 THE INDEPENDENCE HALL OF KOREA All rights reserved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