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홍범식 집(동부리)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한말구국운동 |
| 종류 | 가옥 |
| 상태 | 복원 / 2002년 괴산군이 매입하였으며, 2008년까지 안채, 사랑채, 광채 등 낡은 건물을 수리하고 없어진 건물을 다시 세웠다. 현재는 충청북도 민속문화재로 지정·관리되고 있다. 2008년 조사 당시 시내에 있던 ‘義士洪公範植追慕碑’가 2010년 10월 16일 홍범식 집으로 이전 설치되었다. |
| 정의 | 1910년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나라가 망하자 통분을 이기지 못하고 자결한 홍범식이 살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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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련 조직 | |
| 관련 인물 | 홍범식(洪範植), 홍명희(洪命憙) |
| 관련 내용 |
홍범식(1871~1910)은 자는 성방(聖訪), 호는 일완(一阮)이다. 1888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1902년에 내부주사(內部主事), 혜민서참서(惠民署參書)를 역임하고 1907년에 태안군수로 의병보호에 힘썼다. 1909년 금산군수가 되었으나, 이듬해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나라가 망하자 통분을 이기지 못하여 자결하였다. 유서를 통해 “기울어진 국운을 바로잡기엔 내 힘이 무력하기 그지없고 망국노의 수치와 설움을 감추려니 비분을 금할 수 없어 스스로 순국의 길을 택하지 않을 수 없구나. 피치 못해 가는 길이니 내 아들아 너희들은 어떻게 하던지 조선 사람으로 의무와 도리를 다하여 빼앗긴 나라를 기어이 되찾아야 한다. 죽을지언정 친일을 하지 말고 먼 훗날에라도 나를 욕되게 하지 말아라.”고 당부하였다. 이후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홍범식 집은 1730년경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 후기 중부지방 양반가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고가이다. 건물은 중문을 사이에 두고 동쪽에 안채, 서쪽에 사랑채를 좌우로 배치하고 사랑채 앞에 행랑채를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홍범식의 아들 홍명희도 이곳에서 태어나 자랐다. |
| 참고 문헌 |
「조선총독부관보: 관리 死去」, 『매일신보』, 1910년 9월 9일. 「國恥日의 解說」, 『독립신문』, 1922년 8월 29일. 「流芳百歲의 殉國 諸烈士」, 『한민』, 1936년 8월 29일. 「홍명희 외 2인 판결문」(1919년 4월 17일, 공주지방법원청주지청). 「홍명희 외 2인 판결문」(1919년 5월 19일, 경성복심법원). 「홍명희 외 2인 판결문」(1919년 6월 14일, 고등법원). 「彙報」, 1910년 9월 8일, 『朝鮮總督府官報』.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5, 1971, 1079~1080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3, 1971, 55쪽. 박걸순, 『괴산지방 항일독립운동사』, 괴산문화원, 1996, 109~110쪽. 광복회 충청북도지부, 『충청북도독립유공자공훈록』, 2001, 446쪽. 박걸순, 「一阮 洪範植의 자결 순국과 그 遺訓」, 『군사』79,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11, 315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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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충청북도 괴산군 괴산면 동부리 |
|---|---|
| 주소 | 충북 괴산군 괴산읍 동부리 450-1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홍범식 고택은 현재 복원되어 있다. 홍범식의 아들인 홍명희의 판결문인 「홍명희 등 3인 판결문」에 홍명희의 당시 주소지가 괴산군 괴산면 동부리(1910년 당시 괴산군 일도면 동부리)로 기록되어 있으며 「一阮 洪範植의 자결 순국과 그 遺訓」 연구논문에서 주소를 확인하였다. |














금산군수 시절의 홍범식과 관료들(1910년 4월 20일)
홍범식
홍범식 집 내부
홍범식 집 안채 전경
홍범식 집 입구
홍범식 집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