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전병건 집터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사회운동 |
| 종류 | 가옥 |
| 상태 | 멸실 / 새로운 가옥이 들어서 있다. |
| 정의 | 양산군 양산장터에서의 독립만세시위를 비롯하여 양산청년회·양산청년동맹·신간회 양산지회·양산농민조합 등에 참여하여 활동한 전병건이 살았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1919.3.27 양산군 양산장터 독립만세시위 |
|---|---|
| 관련 조직 | 양산청년회/양산청년동맹/신간회 양산지회/신간회/양산기자동맹/경남적색농민조합건설 동부위원회/양산농민조합 |
| 관련 인물 | 엄주태(嚴柱泰) |
| 관련 내용 |
전병건(全秉健, 일명 全爀, 1899~1950)은 양산면장을 역임한 전기준(全基準)과 정의인(鄭宜仁)의 5남 2녀 중 차남으로 양산군 양산면 중부동에서 태어났다. 1914년 3월 양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1919년 3월 27일 엄주태(嚴柱泰) 등과 함께 양산군 양산장터에서의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여 징역 2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3년 양산청년회 제6회 총회에서 집행위원에 선출되어 양산청년회를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1927년 양산청년회가 해체되고 양산청년동맹이 결성되자 양산청년동맹 임시의장, 집행위원장 등을 역임하면서 이 단체를 이끌었다. 1928년에는 신간회 양산지회 창립에도 관여하였으며, 1929년 6월에는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31년에는 양산기자동맹 집행위원으로 활동하면서 경남적색농민조합건설 동부위원회의 조직책으로 활동하였다. 1932년 동아일보 양산지국장을 역임하였으며, 양산농민조합 제3회 총회에서 집행위원장에 취임하여 소작료 4할을 재결의하였다. 이 때문에 조합 간부 7명이 경찰에 송치되자 이들을 탈환하기 위한 양산경찰서 습격시위를 계획, 실행하였다. 시위를 배후에서 조종한 혐의로 체포되어 징역 4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1936년 3월 출옥하였다. 출옥 후 고문 후유증으로 고생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해방 후, 양산군 인민위원장으로 활동하다가 미군에 의해 체포되었다. 대전형무소로 압송 도중 탈출하였으나 6·25전쟁이 발발하자 양산경찰서에서 연행되어 처형당하였다. 양산장터에서의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한 공로로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 참고 문헌 |
朝鮮總督府 臨時土地調査局, 「梁山郡 邑內面 中部里 地籍原圖」, 1912. 「전병건 공적조서」,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엄주태 등 7인 판결문」, 1919년 5월 28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엄주태 등 6인 판결문」, 1919년 7월 12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5, 1971, 1217~1220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3, 1971, 211~214쪽. 조성운, 「일제하 경남 양산지역의 혁명적 농민조합운동」, 『지촌김갑주교수화갑기념사학논총』, 지촌김갑주교수화갑기념사학논총간행위원회, 1994, 987~1012쪽 김승, 「일제하 양산지역 민족운동과 사회운동」, 『지역과 역사』 14, 부경역사연구소, 2004, 283~328쪽. 양산향토사연구회, 『(증보판)양산항일독립운동사』, 양산시민신문, 2009, 234~237쪽. |
*좌표를 클릭하시면 '길찾기'로 연결됩니다.
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상남도 양산군 양산면 중부동 296-1 |
|---|---|
| 주소 | 경남 양산시 중부동 296 |
| 도로명 주소 | 경상남도 양산시 삼일로 117 |
| 위치 고증 | 「엄주태 등 7인 판결문」 등에 관련 사실이 수록되어 있다. 전병건의 주소지와 관련하여 「엄주태 등 7인 판결문」 및 「전병건 공적조서」에는 양산군 양산면 북부동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제적등본」을 확인한 결과 양산군 양산면 중부동 296-1번지로 기록되어 있어 이를 토대로 「양산군 읍내면 중부리 지적원도」와 현재의 지적도를 상호 비교하여 위치를 확정하였다. |














전병건 집터 입구
위에서 본 전병건 집터
전병건 집터 원경
전병건 집터 근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