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정진학교 터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문화운동 |
| 종류 | 건물 |
| 상태 | 멸실 / 당시의 학교는 없어졌으며, 이후 정진초등학교가 위치하고 있다가 폐교되면서 현재는 착생체험장이 들어서 있다. |
| 정의 | 밀양의 여주이씨 문중에서 민족교육을 실시할 목적으로 설립한 정진학교가 있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
|---|---|
| 관련 조직 | 화산의숙/정진의숙/정우회/수양단 |
| 관련 인물 | 이익구/이병규/이병곤/이병원 |
| 관련 내용 |
정진학교(正進學校)는 항재 이익구(李翊九)가 밀양군 부북면 퇴로리에 1890년에 설립한 화산의숙(華山義塾)의 유지를 계승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화산의숙이 1910년 폐교된 이후 야학으로 유지된 명맥은 1919년 3·1운동 이후 수학, 물리학 등 신지식을 가르치는 학교로 변모하였다. 학교 건립 장소와 재원 확보를 위해 인근 유지들과 협의했으나 합의를 보지 못하고 이병규(李炳圭)·이병곤(李炳鯤)·이병원(李炳瑗) 등 이씨 일문에서 재원을 염출하여 퇴로리 앞에 부지를 마련하고 학교 건물을 짓게 되었다. 1921년 3월 25일 사립 정진의숙(正進義塾)이 정식으로 개교했다. 창학 강령은 화산의숙의 정신을 그대로 계승하여 명륜정덕(明倫正德)과 이용후생(利用厚生)이라 하고 교육의 중점은 국민윤리와 애국정신 및 신지식의 함양에 두었다. 그래서 한글, 우리나라 역사와 지리, 애국가창 등을 통해 애국애족의식을 고취했으며, 산수, 이과, 교련 등 신지식도 가르쳤다. 이러한 교육 내용이 문제가 되어 1921년 9월 교장과 학감을 비롯한 교원 전원이 경찰에 구금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1922년 2월 정진학교로 개칭되었다. 한편, 1932년 8월 정진학교 졸업생들은 동창회를 조직하고 동창회보를 발행하려고 준비하였다. 그런데 일제는 정진학교 졸업생들이 자발적으로 정우회나 수양단과 같은 결사를 조직하고 그 기관지를 발행하려고 한다는 것을 알게되자 정진학교 관련자들을 대대적으로 검거하여 조사하였다. 정진학교는 민족교육을 실시했다는 이유로 일제의 탄압을 받았으며, 그 결과 1939년 4월 강제 폐교되었다. |
| 참고 문헌 |
『동아일보』, 1921년 7월 28일, 「사립정진의숙 소식」. 『동아일보』, 1926년 8월 7일, 「사립정진학교」. 『동아일보』, 1932년 8월 7일, 「밀양경찰 활동, 전후 8명 검거, 정진학교 교원 학생 망라(정우회와 수양단 관련)」. 김성준, 「경남 밀양 근대교육의 요람 정진학교 연구」, 『국사관논총』 23, 국사편찬위원회, 1991, 141~167쪽. 이병곤, 『퇴수재일기(退修齋日記)』, 상(해제), 국사편찬위원회, 2007. 강만길 편, 『밀양의 독립운동사』, 밀양문화원, 2003, 205~207·219~221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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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상남도 밀양군 부북면 퇴로리 |
|---|---|
| 주소 | 경남 밀양시 부북면 퇴로리 294-2 |
| 도로명 주소 | 경상남도 밀양시 부북면 퇴로로 227 |
| 위치 고증 | 『동아일보』 1921년 7월 28일자 기사에 당시 주소지가 기록되어 있다. 「토지대장」을 통해 위치를 확인할 수 있으며, 1919년까지 정진초등학교가 학교명을 이어오다가 폐교되었다. |














정진학교 관련기사(『동아일보』, 1932년 8월 7일)
정진학교 관련기사(『동아일보』, 1921년 7월 28일)
정진의숙 창학기념비
정진학교 터 우측
정진학교 터 원경
정진학교 터 전면
정진학교 터 입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