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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이윤재 집터

기본정보

기본정보
사적지 분류 국내항일운동사적지
운동계열분류 문화운동
종류 가옥
상태 멸실 / 가옥이 신축되어 있다.
정의 한글운동에 헌신하다 조선어학회사건으로 투옥되어 옥사한 이윤재가 살던 곳

관련정보

관련정보
관련 사건 1919 3·1운동/1937 수양동우회사건/1942 조선어학회사건/
관련 조직 면려청년회/흥사단/수양동우회/계명구락부/조선어사전편찬위원회/조선어학회 
관련 인물
관련 내용 이윤재(李允宰, 1888~1943) 호는 환산(桓山) 또는 한뫼이다. 김해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김해의 합성학교, 대구의 계성학교, 마산의창신학교와 의신여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았다. 1919년 평안북도 영변에 있는 숭덕학교로 옮긴 후 3·1운동이 일어나자 학교 안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여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1920년 마산으로 돌아온 이윤재는 면려청년회를 통해 마산지역 문화운동을 이끌었으며, 동아일보 기자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1921년 중국 베이징[北京]대학 사학과에 입학해 수학하였다. 1924년 귀국후 평양의 대성학교와 정주 오산학교, 서울 협성학교 등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한편, 흥사단의 국내 지부와 같은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에도 가입하였다.

1927년 계명구락부(啓明俱樂部)에서 시도했던 국어사전 편찬 작업에 편찬위원으로 참여했으며, 1929년 한글날 기념식장에서 조선어사전편찬위원회를 조직하여 편찬위원으로 활동했다. 한글의 체계적 연구를 위해 1921년에 조직된 조선어연구회가 1931년 일본인 이토[伊藤韓堂]가 주재하는 조선어연구회와 구별을 두기 위해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로 개칭하자, 맞춤법통일안 제정위원, 표준어 사정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어문 정리와 보급에 힘을 기울였고, 기관지인 『한글』의 편집 및 발행 책임자로서 활동하였다.

1930년대 후반 일본어 상용, 창씨개명, 일선통혼으로 황민화 체제를 다져가던 일본은 조선어학회의 한글운동을 좌시하지 않았다. 대대적인 탄압으로 한글학자들을 검거하기 시작했는데, 이윤재는 1937년 6월 발생한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어 옥고를 치렀고, 1942년 10월에는 조선어학회사건으로 함경남도 홍원경찰서에 검거되었다. 1943년 함흥형무소로 이감된 이윤재는 심한 고문으로 12월 8일 옥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 문헌 「이윤재 공적조서」,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이윤재 등 7인 판결문」, 1939년 1월 10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동아일보』, 1924년 2월 1일, 「청년 기타 집회:勉勵靑年 正音 講演」.
『조선중앙일보』, 1934년 4월 8일, 「대중이 읽을 『한글』 잡지 이윤재씨가 발간」.
임종국,「 조선어학회 사건과 침략의 극수」, 『나라사랑』 42, 외솔회, 1982, 22~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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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지역정보
당시 주소 경상남도 마산부 상남동 235
주소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노산동 235
도로명 주소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합포서4길 30
위치 고증 「이윤재 제적등본」을 통해 마산부 상남동 가옥의 지번을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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