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시원여학교 터 신사참배 거부운동지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학생운동 |
| 종류 | 건물 |
| 상태 | 멸실 / 멸실되어 그 원형을 알아 볼 수 없다. |
| 정의 | 1925년 설립된 기독교계 여학교로서 조선총독부의 신사참배 요구를 거부하다 폐교당한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1936 신사참배거부 |
|---|---|
| 관련 조직 | |
| 관련 인물 | 정석록(鄭錫綠) |
| 관련 내용 |
시원여학교(柴園女學校)는 호주선교회에 의해 운영된 기독교계 여학교로서, 진주지역 여성교육기관의 효시이다. 1906년 9월 진주군 대안면 2동에 사립 정숙학교라는 이름으로 개교하였고, 1909년 8월 남학교인 안동학교와 통합하여 사립 광림학교로 인가 받아, 광림학교 부속 여자부, 광림여학교로 불리었다. 1924년 11월 5일 광림학교로부터 분리되어 여학교로 인가를 받아 시원여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1925년 1월 옛 광림학교 운동장 부지에 목조 2층 120평짜리 교사를 신축하고 다시 개교하였다. 그 이름은 정숙학교 초대교장으로 1919년 사망한 시넬리를 기리어 시넬리의 정원이라는 뜻으로 지은 것이다. 일제 말 신사참배가 강제되기 시작하자 선교사와 관련된 기독교계 학교에도 압박의 수위가 높아졌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신사참배를 거부하였던 시원여학교의 선교사와 교장 정성록은 결국 1939년 6월 신사참배거부로 조선총독부로부터 학교를 자진폐교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호주선교회는 1939년 7월 31일 조선총독부에 폐교신청서와 기독교의 자유에 관한 탄원서를 함께 제출하고 폐교하였다. 시원여학교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폐교처분을 받은 첫 미션계 학교이다. 1939년 폐교 후 교사는 1940년 진주사범학교 기숙사로 활용되었고, 6·25전쟁 중 미군폭격으로 전소되었다. |
| 참고 문헌 |
「토지대장」. 『동아일보』, 1924년 11월 25일, 「광림여학교는 시원여학교로 명의를 변경 인가」. 『동아일보』, 1939년 9월 5일, 「私立柴園女學校 二小 水晶分校로 認可」. 김동권,『진주교회80년사』, 진주교회, 1985, 7쪽. 조헌국,『진주교회사(1905~1930)』, 진주교회, 1992, 9∼12ㆍ60∼62쪽. 김경현,『진주이야기 100선』, 진주문화원, 1998, 26∼29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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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상남도 진주군 진주읍 수정정 |
|---|---|
| 주소 | 경남 진주시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동아일보』1939년 9월 5일자 기사에 신사참배 문제로 시원여학교가 조선총독부와 갈등을 빚었던 사실과 폐교조치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위치는「토지대장」을 통해 지번을 확인하였고, 진주교회 이지호(1933년 생) 장로로부터 자문을 받았다. |














시원여학교 제16회 졸업기념(1929.3)
시원여학교(「1:10,000 (昭和8年修正測圖)」, 1933, 조선총독부 육지측량부)
시원여학교 원경(우측 건물, 1930년대)
시원여학교 터 서측
시원여학교 터 원경
시원여학교 터 남측
시원여학교 터 전경
시원여학교 폐교 관련기사(『동아일보』, 1939년 9월 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