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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강창보 집터

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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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지 분류 국내항일운동사적지
운동계열분류 사회주의독립운동
종류 가옥
상태 멸실 / 2층 가정집 건물이 들어서 있어 과거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정의 신인회 활동과 제주도 조선공산당 활동을 주도했던 강창보가 살았던 곳

관련정보

관련정보
관련 사건 신인회, 조선공산당 제주도청년연합회, 조선공산당 제주도야체이카
관련 조직 제주도 청년연합회, 신인회, 조선공산당 
관련 인물 강창보(姜昌輔), 송종현(宋鐘炫), 김택수(金澤銖), 장종식(張鐘植), 오대진(吳大進), 김정로(金正魯), 윤석원(尹錫沅)
관련 내용 강창보(姜昌輔, 1902~1945)는 1902년에 강제원의 장남으로 제주도 제주면 용담리 69번지에서 태어나 심재(心齋) 김석익(金錫益) 문하생으로 학문을 배웠다.
1925년 3월 송종현·김택수 등과 함께 제주도 최초의 사상단체인 신인회(新人會)를 결성하고 교양부 간사를 맡아 활동했다.
1925년 4월 17일 일제에 의해 검거되어 징역 6월형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다. 석방 후에 송종현·김택수·장종식·오대진·김정로·윤석원 등 조선공산당의 세포로 활동하다 1927년 8월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는 제주에서 일어난 공산주의운동의 시작이었다.
1928년 9월에는 제주도청년연합회 서무부 상무위원 및 집행위원으로 있으면서 제4차 조선공산당재건사건으로 경기도에서 검거되어 1930년 12월에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5년형을 선고받았다. 석방된 이후에도 비밀리에 당 재건 활동을 계속 추진하였으며, 제주지역에서 세금불납운동, 묘목강제배포 반대운동 등 농민운동을 주도 하다가 1931년 11월부터는 해녀항일투쟁을 지도하였다.
1932년 5월 조선공산당 제주도 야체이카 책임자로 검거되었으나 극적으로 탈출한 후 일본으로 잠입하여 일본과 흥남지역에서 노동운동을 전개했다. 1943년 4월 국내로 들어오려다 도쿄에서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1944년 3월 징역 7년형을 선고받고 대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1945년 1월 7일 사망하였다.
참고 문헌 「전순협 등 46인 판결문」, 1930년 12월 22일, 국가기록원 독립운동관련 판결문.
「강창보 등 5인 판결문」, 1944년 3월 27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동아일보』, 1925년 3월 19일,「신인회의 조직, 십일일 제주서」
『조선일보』, 1930년 12월 24일,「한상호 등 사십육 최고 오년 징역 언도, 사명에 오년간 집행유예, 사차공당사건 결산」.
제주도지편찬위원회,『제주항일독립운동사』, 제주도, 1996, 234~238·490~515쪽.
김찬흡,『20세기 제주인명사전』, 제주문화원, 2000, 60쪽.
김찬흡,『제주항일인사실기』, 북제주군, 2005, 131~1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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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지역정보
당시 주소 전라남도 제주도 제주면 용담리 69
주소 제주 제주시 비룡길 7-1
도로명 주소
위치 고증 「강창보 판결문」(대구복심법원, 1932년 10월 26일)과 「전순협 등 46인 판결문」에 관련 사실과 당시 주소지가 수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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