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조선성냥공장 동맹파업지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사회운동 |
| 종류 | 건물 |
| 상태 | 재개발된 지구로 현재 인천 조선성냥공장 부지 일부에 배다리성냥마을박물관이 들어서 있다. |
| 정의 | 1920년대 인천의 조선인촌주식회사 여성 노동자들이 저임금과 근로개선을 요구하며 동맹파업을 벌인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1921∼1932 조선인촌주식회사 여직공·노동자 동맹파업 |
|---|---|
| 관련 조직 | 인천노동연맹 |
| 관련 인물 | 고삼출/이창문/유두희/김명진 |
| 관련 내용 |
인천의 조선인촌주식회사(일명 조선성냥공장)은 일본인들에 의해 설립되어 운영되었는데 일의 특성상 여성들이 많이 고용되었다. 그러나 성냥개비 1만개에 60전이라는 낮은 임금과 열악한 노동조건으로 인하여 노동자들의 처우 개선 요구는 민족적 저항의식과 연계되어 조직적인 동맹파업으로 발전하기에 이르렀다. 1921년 3월 11일 마침내 조선성냥공장 여직공 150여 명이 일본인 지배인을 배척하며 동맹파업을 단행하였다. 1926년 4월 2일 조선성냥공장 노동자 200여 명이 회사에서 임금을 삭감하려 하자 동맹파업을 일으켰다. 이에 사주측은 인천경찰서 고등계 형사의 위력을 빌려 주동자 수명을 검속하며 파업의 열기를 꺾고자 하였으나 단결한 노동자들은 계속 투쟁을 전개하였다. 결국 4월 29일 회사측이 노동자들의 요구조건을 수락하면서 한달 가량 지속된 동맹파업은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파업에 개입했다하여 인천노동연맹의 고삼출·이창문·유두희·김명진 등이 경찰에 유치되었다. 이후 1932년 5월 2일에는 노동자 360명이 오전 10시에 임금인하 반대, 8시간 노동제를 내걸고 동맹파업에 돌입하였다. 급보를 접한 인천경찰서에서는 경찰대를 파견하여 회사문을 폐쇄한 채 외부와의 연락을 두절시켰다. 아울러 노동자 3명을 검속하여 취조하였다. 회사측에서도 노동자들을 개별 설득하는 한편, 사회주의자들의 선동에 속지말 것을 선전하였다. 5월 1일 공장에서 메이데이 격문 사건이 있었기 때문에 주변에서는 배후에 의식화된 세력이 있을 것으로 의심하고 있었다. 노동자들은 9일에 일단 파업을 중단하였다가 역량을 재결집하여 임금 50% 인상과 일본인 감독의 배척을 요구하며 재차 파업하는 등 조직적인 저항을 전개하였다. |
| 참고 문헌 |
『매일신보』, 1921년 3월 14일, 「仁川燐寸職工同盟罷業, 백오십명이 지배인 배척」. 『시대일보』, 1926년 4월 29일, 「 仁川燐工, 全部就業」. 『시대일보』, 1926년 5월 2일, 「 仁川勞聯委員 陸續引置」. 『매일신보』, 1932년 5월 3일, 「대우개선 등 조건으로 삼백여직공 盟罷」. 中村資良, 『朝鮮銀行會社要錄』, 東亞經濟時報社, 1921, 41∼42쪽. 인천광역시사편찬위원회,『인천광역시사』2, 인천광역시, 2002, 686쪽. 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 역사문화연구실, 『(근대문화로 읽는)한국최초 인천최초』, 2005, 41쪽. 인천광역시, 『인천 공단과 노동자들의 생활문화』, 2018. 수도국산달동네박물관, 『인천의 마음의 고향 송현동』, 2018. 오카모토,『역주 인천항』, 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 역사문화연구실, 2005, 124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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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기도 인천부 금곡정 32 |
|---|---|
| 주소 | 인천 동구 인천광역시 동구 금곡로 19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조선은행회사요록』(1921)에 ‘조선인촌주식회사(朝鮮燐寸株式會社)’의 연혁이 기록되어 있다. 조선인촌주식회사(일명 조선성냥공장)의 설립일은 1917년 10월 4일이고, 당시 주소지는 인천부 금곡리 32번지이다. 『중앙일보』2008년 3월 7일자에는 인천 근대문화 발상지인 배다리 주변으로 성냥공장의 위치를 표시한 지도가 있어 위치를 비정할 수 있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