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모곡학교 터
기본정보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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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계열분류 | 문화운동 |
종류 | 건물 |
상태 | 복원 / 2004년 6월에 남궁억기념관이 건립되었고, 학교의 일부 건물과 예배당이 복원되어 있다. |
정의 | 1920년 2월 남궁억이 세운 학교로 민족교육을 실시한 곳 |
관련정보
관련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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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조직 | |
관련 인물 | 남궁억(南宮檍) |
관련 내용 | 1919년 9월에 남궁억(1863~1939)이 사재를 털어 홍천군 서면 모곡리(일명 보리울) 부근에 대지를 매입하고 남감리교 선교부의 도움으로 건평 30평에 8칸짜리 교회를 세웠다. 그리고 교회 건물에 무인가 학교를 설립하고 교육활동을 시작하였다. 이후 1920년 2월 모곡학교(牟谷學校)라는 간판을 걸고 학생들을 모아 4년제 보통학교 정도의 신교육을 실시하였다. 1922년 9월 4년제 사립 모곡학교 설립인가를 받고 정식으로 개교하였다. 주변의 청년학생들이 모여들자, 유지들의 협조를 얻어 1922년 10월 100평의 새 교사와 기숙사를 건립하였다. 1925년 3월 6년제 사립학교(보통학교)의 인가를 취득하여 정식 학교로 발전하게 되었다. 남궁억은 1924년 겨울에 역사교과서 『동사략』(4권)을 간행하고, 1929년에는 사화집(史話集)인 『조선이야기』(5책)를 저술하였다. 또한 국어와 역사 교육, 농촌을 잘 살게 할 수 있도록 실업교육을 시행하고, 독서회를 만들어 독서활동을 장려하였다. 그는 학교 실습지 500여 평에 무궁화 묘목을 기르고, 무궁화 묘목을 교회와 사립학교의 지우들에게 보급하였다. 그러나 1933년 11월 일제 경찰이 학교·교회와 청년들의 집을 급습, 남궁억과 교사, 그리고 마을청년 등 28명을 홍천경찰서로 끌고 갔다. 이로 인해 1933년 12월 모곡학교가 폐교하게 되었다. 남궁억은 1934년 3월 12명의 청년과 함께 징역 1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7월에 병보석으로 석방되었으나, 1939년 4월 5일 모곡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
참고 문헌 |
『매일신보』, 1927년 7월 19일, 「모곡학교에 서광, 유지의 동정이 답지」. 『동아일보』, 1929년 1월 5일, 「십년일람: 현저히 발달된 찬연한 지방문화-홍천군, 교육기관-모곡학교」. 송병휘, 「한서 남궁억선생」 (1)·(2)·(3), 『동아일보』, 1933년 3월 29일자, 3월 30일자, 4월 1일자, 『동아일보』, 1934년 12월 20일, 「홍천의 모곡학교 보교로 변경 개교, 남궁억 노인이 심혈을 경주한 곳, 피검이래 경영난으로」. 『동아일보』, 1939년 4월 7일, 「남궁억씨 자택에서 영면」. 광복회 강원도지부, 『강원도 항일독립운동사』 Ⅲ, 1992, 442~447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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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당시 주소 | 강원도 홍천군 서면 모곡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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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 강원 홍천군 서면 모곡리 386 |
도로명 주소 | 강원도 홍천군 서면 한서로 677 |
위치 고증 | 『동아일보』 및 『매일신보』 등의 기사에 남궁억이 설립한 모곡학교가 홍천군 서면 모곡리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지 조사의 내용이 이와 일치함을 남궁억기념관에서 확인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