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소난지도 의병총
기본정보
사적지 분류 | 등급분류 제외(항일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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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계열분류 | 의병전쟁 |
종류 | 묘소 |
상태 | 원형보존 / 1977년 소난지도의병의 유골을 수습하여 조성한 봉분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
정의 | 1908년 3월 15일 전투에서 순국한 소난지도의병들의 유골을 수습하여 만든 무덤이 있는 곳 |
관련정보
관련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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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조직 | 소난지도의병 |
관련 인물 | 홍원식(洪元植) |
관련 내용 |
소난지도(小蘭芝島)의병은 홍원식(洪元植)이 인솔하는 100여 명으로 구성된 항일부대이다. 당진 대호지의 소난지도에 근거지를 두고 해상으로 당진일대의 육지에 상륙하여 일본주재소나 관아를 공격하였으며, 친일파를 처단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홍성경찰분서에서는 소난지도의병을 진압하기 위하여 1908년 3월 13일 15명으로 구성된 추격대를 편성하여 소난지도에 파견하였다. 일본경찰대는 3월 15일 아침 6시경 소난지도에 상륙을 시도하였으나 의병으로부터 선착장에서 반격을 받아 우회하여 마을 뒤쪽으로 상륙하였다. 의병은 지형을 이용하여 일본경찰대에 항전하였으나 탄약이 고갈되어 일본경찰대의 추격을 받게 되었다. 의병들은 절벽 아래로 뛰어내려 동굴 속에 몸을 숨기고자 하였으나 발각되어 5명이 순국하였다. 또 섬의 동남쪽에 있는 돌각지점에서 경찰대의 집중 총격을 받아 14명이 순국하였다. 나머지 의병들은 바닷물에 뛰어 들어 목숨을 부지하고자 하였으나 행방불명되고 말았다. 이 소난지도 전투에서 의병은 100여 명이 전사 또는 행방불명된 것으로 확인된다. 9명이 부상을 입고 포로로 잡혔으나 이들 역시, 현장에서 순국한 것으로 보인다. 이 의병총은 흩어져 있던 유해를 해방 후에 주민들이 수습하여 조성한 것이다. 1977년 당시 석문중학교 신이균 이사장이 중심이 되어 소난지도의병의 흩어진 유골을 수습하여 봉분을 조성하였다. 1980년 소난지도의병총비 건립추진위원회에서 기념비석을 세웠다. |
참고 문헌 |
『폭도에 관한 편책』, 홍경비 143-3호, 1908년 3월 20일. 『대전일보』, 1982년 3월 24일,「소난지 의병총발굴 자체관리」. 『한국일보』, 1983년 9월 13일,「소난지도에 구한말의 삼별초」. 김상기,「1908년 당진 소난지도 의병의 항일전」,『한국근현대사연구』28, 한국근현대사학회, 2004, 45-48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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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당시 주소 | 충청남도 당진군 내맹면 소난지도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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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 충남 당진시 |
도로명 주소 | |
위치 고증 | 『대전일보』1982년 3월 24일자와『한국일보』1983년 9월 13일자 기사 등에 의하면, 1977년 석문중학교 신이균 이사장이 중심이 되어 소난지도의병의 흩어진 유골을 수습하여 봉분을 조성하였으며, 1980년 소난지도의병총비 건립추진위원회에서 기념비석을 세웠음을 확인할 수 있다. 현재 봉분 앞에는‘의사총’이란 비석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