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배창근의병 활동지 - 초평면 영구리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의병전쟁 |
| 종류 | 거리 |
| 상태 | 변형 / 농지로 개간되어 있다. |
| 정의 | 1907년 7월 18일 의병 배창근 등이 일본군 의병 토벌대를 처단한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1907년 7월 18일 의병의 일본군 처단 |
|---|---|
| 관련 조직 | |
| 관련 인물 | 배창근(裵昌根), 이기석(李基石), 서쾌준(徐快準), 노영섭(盧榮涉), 설영천(薛永淺) |
| 관련 내용 |
대한제국군 청주진위대 육군 하사출신인 배창근(1869~1909)과 이기석은 1907년 8월경 군대가 해산되자 의병으로 참전하였다. 이들은 1907년 음력 7월 17일 청안군 원서면 구정탄 주막에 다른 의병대원들과 잠시 들렸다. 여기서 일본 육군 이등병 도전청오랑(島田淸五郞)과 율유길(栗留吉)이 주막 부근에서 야영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이들은 의병 진압을 목적으로 출동하였다가 낙오된 상태였다. 배창근과 이기석은 서쾌준, 노영섭, 설영천 등과 함께 낙오된 일본군들을 처단할 계획을 세웠다. 배창근은 여천리에 가서 일본군이 오는지 여부를 주시하였다. 이튿날 이기석과 배창근 등은 일본군의 동선을 미행하면서 진천군 초평면 사방기에 이르렀다. 서쾌준은 일본군 1명을 닭을 잡자는 구실로 다른 촌락으로 유인하여 사살하였다. 노영섭과 설영천도 주막 부근에서 나머지 일본군을 결박 후 사살하였다. 『승정원일기』와『순종실록』에도 관련 내용이 기록돼 있다. 청주 출신인 배창근과 그의 부하인 이기석은 일본 헌병에 붙잡혀 1909년 7월 9일과 17일 교형 순국하였다. 정부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배창근(1993)과 이기석(2013)에게 각각 추서하였다. |
| 참고 문헌 |
「배창근 등 판결」,『독립운동사자료집』별집 1-의병항쟁 재판기록,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4, 373-374쪽. 「법부 대신이 죄인 배창근 등을 교형에 처하겠다고 아뢰었다」,『승정원일기』, 순종 3년(1910) 5월 22일(양력 7월 9일). 「살인범 배창근과 이기석을 교수형에 처하도록 하다」, 『순종실록』, 순종 2년(1910) 7월 9일.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별집1, 1974, 373~374쪽. 국가보훈처,『독립유공자공훈록』11, 국가보훈처, 1994, 135쪽. 한글학회,『한국지명총람』3, 1970, 503쪽. 정제우,「진천지역의 의병전쟁」,『상산문화』6, 상산고적회, 2000, 57쪽. 서태원, 「갑오개혁 이후 충청북도 지방군」,『한국사연구』136, 2007, 279~283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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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충청북도 진천군 초평면 사방기 |
|---|---|
| 주소 | 충청북도 진천군 초평면 영구리 515-3(영구리길 160) 일대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배창근 판결문」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이와 함께 최상섭(영구리 어은 거주, 2008년 조사 당시 72세)이 현재 영구물 일대라고 증언하여 현장을 확정하였다.『한국지명총람』도 초평면 영구리 영구물 마을을 ‘사방터’라고 서술하였다. 따라서 영구물과 사방기는 동일한 지명이다. |














영구리 전경
영구리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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