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내수공립보통학교 터 학생맹휴지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학생운동 |
| 종류 | 건물 |
| 상태 | 멸실 / 위치는 변화가 없지만 옛 건물은 없어지고, 현재 새로운 건물의 학교가 들어서 있다. |
| 정의 | 1931년 6월 27일 내수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동맹휴학을 전개한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1931.6.27 내수공립보통학교 동맹휴학 |
|---|---|
| 관련 조직 | 괴산청년동맹 증평지부 |
| 관련 인물 | 홍봉희(洪鳳喜)/윤경훈(尹慶勳)/윤성훈(尹成勳)/양희득(楊喜得)/송용섭(宋容燮)/이종복(李宗馥)/임노선(林魯善) |
| 관련 내용 |
1931년 6월 14일 내수공립보통학교 안에 있던 오동나무에 ‘독립만세’라는 격문이 부착되었다. 학교는 일제 경찰에 알리었고, 경찰은 의심이 가는 5학년 담임선생 홍봉희와 5학년 학생 윤경훈(14세), 4학년 학생 윤성훈(12세) 등을 잡아가서 취조하였고, 가택수사까지 하였다. 일경은 이 사건을 통해 평소 항일의식이 있었던 인사들을 탄압하는 구실로 악용하여 괴산청년동맹 증평지부 간부 양희득·송용섭, 청주군 북일면 오동리 이종복의 집도 가택수색하여 서적을 압수하였다. 또한 홍봉희가 담임을 맡고 있던 5학년 급장 임노선(18세)의 집도 가택수색을 하였고, 그와 친분관계가 있던 이종복도 청주경찰서로 구금되어 취조를 받았다. 결국 이 일은 임노선의 소행으로 밝혀졌고, 일경은 담임을 맡고 있던 홍봉희에게 책임을 물어 사직서를 내게 했다. 6월 27일 오전 10시, 전교생이 모인 가운데 홍봉희가 퇴임 고별사를 하자, 전교생은 통곡을 하였고, 그가 담임하였던 5학년생 40여 명은 홍봉희 선생의 유임을 주장하며 수업을 거부하고 퇴교해 버렸다. 이후 그 학생들은 맹휴투쟁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당시 주재소는 동맹휴학을 주도한 학생들 중 5학년 5명과 6학년 1명을 검속하여 취조하였다. 그럼에도 맹휴는 계속되자 일제는 검속한 학생들을 즉시 석방하고 학부형회를 열어 대책을 강구하였다. 내수공립보통학교는 1917년 11월 사립 내수보통학교로 개교하였다가 1919년 9월 공립 내수보통학교로 개칭되었다. 현재 내수초등학교의 전신이다. |
| 참고 문헌 |
『동아일보』, 1931년 6월 30일, 「내수공보에 격문, 경찰관 돌연활동」. 『조선일보』, 1931년 6월 22일, 「내수보교 격문 첨부로, 경찰 아연 활동」. 『조선일보』, 1931년 7월 2일, 「청주 내수공보 맹휴의연 계속(교원의 사직이 도화선)」.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13, 1977, 620쪽. 박걸순, 「일제하 충북지방의 학생활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17,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1, 380~381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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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충청북도 청주군 북일면 마산리 |
|---|---|
| 주소 | 충청북도 청주시 내수읍 마산리 171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조선일보』 1931년 6월 22일자 및 7월 2일자, 『동아일보』 1931년 6월 30일자 등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내수공립보통학교는 내수초등학교의 전신으로 개교 이래 위치가 바뀌지 않았다고 하여 위치를 확정하였다. |














내수공립보통학교 터 입구
내수공립보통학교 격문 부착 관련기사(『동아일보』, 1931년 6월 30일)
내수공립보통학교 터 전경(현재 내수초등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