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송명학교 터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문화운동 |
| 종류 | 건물 |
| 상태 | 멸실 / 현재 천주교 벌교성당이 들어서 있다. |
| 정의 | 일제강점기 보성군 벌교포지역의 가난한 아동을 위해 송광사와 지역유지들이 세운 민중교육기관이 있었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
|---|---|
| 관련 조직 | 송명학교/송명사숙/송명학관/송명학원 |
| 관련 인물 | 채중현(蔡重鉉)/박사윤(朴士胤)/홍인표(洪寅杓)/서도길(徐道吉)/서민호(徐珉濠) |
| 관련 내용 |
송명학교(松明學校)는 일제강점기 보성군 벌교포지역 무산아동의 배움에 대한 열망을 채워준 민중교육기관이었다. 포교사업을 위하여 송광사는 1916년 여름부터 벌교포 홍교마을에 초옥(草屋)을 사들여 포교당을 개설하였으며, 1922년 4월에 교당을 교사로 전용하여 송명사숙(松明私塾)의 이름으로 근대교육을 시작하였다. 송명사숙의 발기인으로는 지역유지 채중현(蔡重鉉)·박사윤(朴士胤)·홍인표(洪寅杓)·서도길(徐道吉) 등이 참여하였다. 1923년 4월에 포교당 내에 학교를 설립하고 학교 건물을 짓기 시작하여 1923년 10월에 완공하여 신교사로 이전 정식으로 개교하였다. 1924년 4월 사립 송명학관(松明學館)으로 인가를 받았으며, 1931년 7월에는 송명학원(松明學院)으로 개편되었다. 송명학교의 학제는 처음에는 4년제였다가 6년제로 바뀌었으며, 개교 이후 채중현 교장이 계속 운영해오다가 1935년에 서민호(徐珉濠)가 운영을 맡았다. 송명학교는 일제강점하에서 우리말과 글을 지키고자 노력한 민족학교였으며, 송명학교의 강당에서는 각종 집회가 열리거나 여자를 위한 야학이 운영되는 등 지역사회를 위한 장소로 활용되었다. |
| 참고 문헌 |
『동아일보』, 1923년 5월 7일, 「벌교 송명사숙 확장」. 『동아일보』, 1929년 3월 3일, 「松廣寺補助로 松明學校支續」. 『동아일보』, 1931년 7월 17일, 「松明學院 認可」. 『동아일보』, 1932년 3월 4일, 「松明學校를 擴張하라」. 『동아일보』, 1932년 4월 24일, 「松明學校後援會 維持問題討議, 학부형과 지방유지가 모여 無産兒童敎育機關」. 『동아일보』, 1934년 3월 31일, 「송명교 학년 연장」. 『조선중앙일보』, 1933년 5월 4일, 「송명학교 교실 증축, 지방 인사들의 지지 후원으로」. 벌교읍지편찬위원회, 『벌교100년』, 2007, 75~92쪽. 박병섭, 「벌교의 민중학교였던 송명학교」, 『국사교육』 6, 전남대국사교육과, 2008, 99~119쪽. |
*좌표를 클릭하시면 '길찾기'로 연결됩니다.
지역정보
| 당시 주소 |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면 벌교리 |
|---|---|
| 주소 | 전남 보성군 벌교읍 벌교리 52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동아일보』 1923년 5월 7일자, 1929년 3월 3일자, 1932년 3월 4일자 등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고흥고등학교 교사 박병섭(53세, 전라남도 순천시 남정동 거주) 씨의 증언으로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다. |














송명학교 터 별관
송명학교 터 전경(현 벌교천주교성당)
송명학교 터 우측
송명학교 터 정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