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영광청년회관 터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사회운동 |
| 종류 | 건물 |
| 상태 | 멸실 / 당시 건물은 없어지고, 현재 영광교육청 주차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
| 정의 | 1918년 창립되어 1927년 해체될 때까지 영광지역 청년운동의 중심이 되었던 영광청년회의 회관이 있었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
|---|---|
| 관련 조직 | 영광청년회/영광유치원/영광학원/영광중앙학교기성회/영광청년동맹 |
| 관련 인물 | 정인영/위계후/조주현/조규원/편진욱/정태희/조용남/서순채/김형모/유봉기/조영달 |
| 관련 내용 |
영광청년회(靈光靑年會)는 1918년 창립되어 3·1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고 영광유치원·영광학원·영광중학교기성회 등의 설립과 운영의 주역을 맡았다. 영광청년회는 설립 이후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한글강습회와 학술 강좌·위생 강연·운동회 등을 개최하며 영광지역 청년운동을 이끌었다. 기관지 『靈光』을 발행하여 정치·시사·학술·문예에 대한 일반인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뿐만 아니라, 주한미국영사가 걸인과 불구자를 모아 놓고 돈을 뿌리는 모습을 촬영한 것에 대해 경고문을 발송하는 등 정치문제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이처럼 영광지역에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던 영광청년회는 1927년 경 대두된 전남지역 단일청년동맹조직에 영향을 받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해체가 논의된 것이다. 영광청년회는 1927년 12월 5일 영광청년회관에서 임시총회를 개최하고 영광군의 통일적인 단일청년동맹조직과 영광청년회 해체에 대한 논의를 진행하였다. 그 결과 영광청년동맹 창립준비회를 결성하고 영광청년회를 해체하는 것에 합의를 이루었다. 이로써 영광청년회는 해체되었다. 그러나 이후 일제의 감시로 탄압이 가중되고 만주사변 발발로 전시체제로 전환되면서 모든 분야의 활동이 침체의 늪에 빠져들었고, 1934년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 당하였다. 영광지역의 민족운동을 주도한 영광청년회의 회장은 초대 정인영(1918~1922), 2대 위계후(1922~1930), 3대 조주현(1931~1934)이었고, 조규원·편진욱·정태희·조용남·서순채·김형모·유봉기·조영달 등이 임원으로 활약하였다. |
| 참고 문헌 |
『동아일보』, 1920년 4월 19일, 「영광청년회 회관과 운동장 건설호」·「영광청년회 강연회」. 『동아일보』, 1920년 5월 8일, 「영광청년회 제1회 정기총회」. 『동아일보』, 1922년 7월 31일, 「영광청년의 활동」. 『동아일보』, 1923년 7월 22일, 「靈光靑年會總會」. 『동아일보』, 1926년 6월 2일, 「全南 靈光靑年會의 臨時總會가 開催」. 『동아일보』, 1927일 5월 7일, 「靈光靑年會」. 『동아일보』, 1927년 7월 2일, 「기타비행비리」. 『동아일보』, 1927년 12월 8일, 「영광청년회 해체」. 『중외일보』, 1927년 12월 10일, 「영광청년 해체」. 전라남도, 『전남 근대문화유산 조사 및 목록화사업』, 전라남도, 2003, 125쪽. 『영광21』, 200년 7월 28일, 「다양한 형태의 모임 결성해 지역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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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전라남도 영광군 영광면 무령리 |
|---|---|
| 주소 | 전남 영광군 영광읍 무령리 365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당시 영광청년회관의 위치를 알려주는 명확한 자료는 없다. 다만, 『영광21』 2005년 7월 28일자 기사에서 청년회관이 현 영광우체국 뒤에 있었다는 것을 통해 위치를 비정하였다. |














영광청년회관 터(2023년 촬영)
영광청년회관 터(2023년 촬영)
영광청년회관 터 전경(2023년 촬영)
영광청년회관 터 전경(2023년 촬영)
영광청년회 해체 기사(『동아일보』, 1927년 12월 8일)
영광청년회 활동 기사(『동아일보』, 1920년 4월 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