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서삼보통학교 학생운동지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학생운동 |
| 종류 | 건물 |
| 상태 | 멸실 / 서삼공립보통학교는 없어졌고, 현재 장성서삼초등학교가 위치하고 있다. |
| 정의 | 1931년 6월 조선어시간 증가, 실습시간 단축, 월사금 반감, 구타 금지 등을 요구하며 학생들이 동맹휴학을 벌인 서삼공립보통학교가 있었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1931.6.23 장성군 서삼공립보통학교 학생 동맹휴학 |
|---|---|
| 관련 조직 | |
| 관련 인물 | 김수영/남길우/반재천/반백환/정진무/김요진/송영근/정학채/김기철 |
| 관련 내용 | 1931년 6월 23일 서삼공립보통학교 4학년 학생 김수영·남길우·반재천·반백환·정진무 등 23명은 3학년 학생 김요진·송영근·정학채 등과 함께 일본정신을 주입하려는 일본인 교장 퇴진운동을 계획하고 등교거부운동을 결의하였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안 교사 김기철은 4학년 학생만 시위에 참가하는 것이 좋다고 권유함에 따라 4학년 학생 19명은 '조선어시간 증가, 실습시간 단축, 체조시간에 스파이크화로 차지 말 것, 월사금 반감, 구타 금지, 교장 매일 출근, 점심시간에 자유' 등 7개항을 학교당국에 요구하며 동맹휴학에 나섰다. 이들은 학교 뜀틀 옆에서 모임을 갖고 인근 꼴재로 가서 시위를 벌인 뒤 다시 천새봉으로 몰려가 만세를 부르며 '일본인 교장은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며 등교거부운동을 펼쳤다. 장성의 대표적 항일지식인이었던 김기철은 이 사건의 배후로 몰려 사직하였고, 이후 장성에서 7년 동안 야학운동을 벌이다 경찰에 체포되었다. 1950년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
| 참고 문헌 |
『조선총독부관보』, 1929년 10월 24일, 「지방청공문 : 전라남도 고시 제172호」. 『동아일보』, 1931년 7일 2일, 「서삼공보생 동요, 사학년 전부 결석, 칠개조건을 학교에 요구, 학교당국 동분서주」. 『동아일보』, 1931년 10월 26일, 「서삼공보 맹휴, 조건부 해결」. 『장성군민신문』, 2004년 3월 28일, 「성재선생 추모비 제막식 열려」. 『장성신문』, 2005년 8월 30일, 「장성에서도 초등학생 항일의거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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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전라남도 장성군 서삼면 장산리 |
|---|---|
| 주소 | 전남 장성군 서삼면 장산리 196 |
| 도로명 주소 | 전라남도 장성군 서삼면 축령로 368 |
| 위치 고증 | 『조선총독부관보』 1929년 10월 24일자 서삼공립보통학교의 위치가 기록되어 있다. |














서삼보통학교 동맹휴학 기사(『동아일보』, 1931년 10월 26일)
서삼보통학교 입구
서삼보통학교 동맹휴학 기사(『동아일보』, 1931년 7월 2일)
서삼보통학교 학생운동지 정면(현 장성서삼초등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