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밀양농잠학교 터 동맹휴학지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학생운동 |
| 종류 | 건물 |
| 상태 | 변형 / 옛 교사는 없지만 이후 밀양대학교가 사용하다가 지금은 학교 이전으로 비어 있다. |
| 정의 | 1927년과 1930년 세차례에 걸쳐 민족차별에 대한 동맹휴학투쟁이 대규모로 일어났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1927·1930 동맹휴학 |
|---|---|
| 관련 조직 | |
| 관련 인물 | 이몽돌(李夢乭)/황용암(黃龍岩) |
| 관련 내용 |
일제하 밀양에서 전개된 대규모의 학생동맹휴교는 지역의 유일한 중등교육기관인 밀양농잠학교에서 주로 발생하였다. 1927년 11월 6일 2학년 급장 이몽돌이 일본인 순사에게 모욕을 받았다는 점과 일본인 교사 2인이 이를 배척했다는 이유 들어 11월 9일 밀양공립농잠학교 2학년 30명 전원이 등교를 거부하면서 시작된 동맹휴학은 1학년까지 확대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3학년을 맡고 있던 스즈키[鈴木初三郞] 선생이 3학년생을 사주하여 동맹휴학 주동자를 구타하는 사건까지 일어나 동맹휴학이 지속되었다. 이에 교장은 스즈키를 학교에서 퇴출시키고, 3학년 폭행학생 10명을 무기정학, 1·2학년 급장과 부급장 4명도 무기정학시킴으로서 무마시켰다. 일본인 선생과 학생들 간의 갈등이 극에 달해 있던 1930년 11월 1일 수학여행문제 등을 계기로 1·2·3학년생 139명 전원이 동맹휴학을 다시 전개했다. 학생들은 피로가 겹쳐 하루 쉬기를 요구하며 많은 학생들이 조퇴나 결석을 했고, 학교는 실습에 빠졌다는 이유로 1학년생 전원에게 3일간 근신 처분을 내렸다. 이와 같은 학교당국의 부당한 조치에 분개하여 전교생 130여 명은 황용암의 지도 아래 11월 3일 총동맹휴학을 단행하였다. 교장과 학부모 대표의 협상결과 학생의 요구조건이 받아들여져 무마되는 듯했으나 학교가 요구조건을 이행하지 않자 12월 5일 다시 2차 동맹휴학이 시작되었고, 요구조건도 더 확대되었다. 요구조건은 교사들의 배척 뿐만 아니라 학교시설 개선과 등록금 인하까지 확대되었다. 학교는 동맹휴학에 참가한 129명을 퇴학시키는 것으로 마무리지었다. 이로서 1930년 동맹휴학은 큰 성과 없이 많은 학생들이 피해를 입는 것으로 끝났다. 그러나 민족교육 측면에서 의미있는 진전을 이룩한 사건이라고 하겠다. |
| 참고 문헌 |
「토지대장」. 『동아일보』, 1927년 11월 13일, 「密陽農蠶校 一二年 盟休」. 『동아일보』, 1930년 11월 5일, 「密陽農蠶校 學生 一同盟休, 오래인 감정이 폭발되어 學校處罰에 不平품고」. 『동아일보』, 1930년 12월 6일, 「밀양농잠학교, 일이년생 또 휴학, 요구조건 거절로 다시 맹휴」. 경상남도경찰부,『고등경찰관계적록』, 1936, 74∼75쪽. 강만길 편,『밀양의 독립운동사』, 밀양문화원, 2003, 221∼223·313∼321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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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상남도 밀양군 밀양면 내이동 |
|---|---|
| 주소 | 경남 밀양시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동아일보』, 1927년 11월 13일자, 1930년 11월 5일자, 1930년 12월 6일자 및 『고등경찰관계적록』 등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토지대장」에 1924년 밀양공립농잠학교 부지로 조성된 내용이 있어 그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














밀양농잠학교 일제시기 운동회 사진
밀양농잠학교 일제시기 운동회 사진
입구 방면에서 바라본 밀양농잠학교 터
입구 방면에서 바라본 밀양농잠학교 터
밀양농잠학교 터 입구
운동장에서 바라본 밀양농잠학교 터
밀양농잠학교 터 전면
밀양농잠학교 7회 졸업사진(1932)
밀양농잠학교 해방후 첫 졸업(1946, 본관 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