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고성 3·1운동 계획지 - 철성의숙 터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3·1운동 |
| 종류 | 건물 |
| 상태 | 멸실 / 건물의 흔적은 찾을 수 없고, 그 터는 현재 논으로 바뀌어 있다. |
| 정의 | 고성지역 민족교육기관이자 고성군 3·1운동 만세시위가 처음으로 논의된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1919 3·1운동 |
|---|---|
| 관련 조직 | 신간회 고성지회 |
| 관련 인물 | 박거수(朴居洙)/이주현(李周賢)/박진완(朴鎭完)/배만두(裵萬斗)/이상은(李相銀)/김상욱(金相煜) |
| 관련 내용 |
철성의숙(鐵城義塾)은 고성군 철성면 무량리에 사는 박거수가 1908년 사재를 털어 덕선리 선동마을에 설립한 학교로 1930년 9월 폐교될 때까지 22년간 민족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철성의숙은 삼은(三恩), 곧 국은(國恩)·사은(師恩)·부은(不恩)을 기반으로 한 애국애족정신으로 나라를 되찾고 조국의 완전독립을 꾀하는 것을 교육목표로 삼았다. 학생들에게 애국가를 부르게 하고 학교 주변에는 무궁화를 심는가 하면 개천절에는 대운동회를 여는 등 학생들의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데에 열중하였다. 1929년 4월 운영상의 이유로 폐교될 당시 신간회 고성지회는 학교 측이 폐교를 결정하고 그 재산을 학교비(學校費)에 기부하기로 한 무성의한 행동을 비난하면서 철성의숙을 복교(復校)시키려 노력하였다. 하지만 일제는 이를 끝까지 허락하지 않았고, 결국 철성의숙은 1930년 9월 폐교되었다. 일제시기 고성의 중요한 사립 교육기관이었던 철성의숙은 이 외에도 고성지역 3·1만세운동의 첫 시발점이기도 하다. 1919년 3월 15일 밤 철성의숙으로 진주 사람 이주현(의열단원으로 제1차 일본인 고관암살 사건에 연루)이 찾아왔는데, 이주현은 박거수와 박진완에게 고성에서도 독립만세를 거행할 것을 설득하고 독립선언서를 전달한 후 돌아갔다. 이에 박거수와 박진완은 배만두·이상은·김상욱 등과 실행 계획을 상의하고 3월 17일을 거사일로 정한 후 박거수 집과 철성의숙에서 태극기를 만들었다. 거사는 마산가도, 통영가도, 진주가도, 대가가도 네 가도에서 한꺼번에 일으켰다가 장터에 모여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거리를 행진하기로 논의하였다. 그러나 대가가도(철성의숙에서 읍내로 가는 길)에서의 거사가 사전에 누설되면서 헌병들이 들이닥쳐 무산되고 말았다. |
| 참고 문헌 |
「고성군 철성면 덕선리 지적원도」,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 1916. 『동아일보』, 1927년 10월 22일, 「순회탐방(467): 해륙산물이 각처에 은성(2), 양잠양계가 유망, 고성-교육계, 철성의숙」. 『동아일보』, 1929년 4월 3일, 「고성 철성의숙, 경비곤란으로 폐교, 금춘 졸업을 최후로」. 『동아일보』, 1929년 4월 14일, 「鐵城義熟復校?, 新幹會活動으로」. 『중외일보』, 1930년 9월 17일, 「固城鐵城義塾, 又復閉鎖命令」. 박상락,『무량산인의 한평생』, 문성출판사, 197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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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상남도 고성군 철성면 덕선리 |
|---|---|
| 주소 | 경남 고성군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동아일보』1927년 10월 22일자 기사에 철성의숙이 고성군 철성면 덕선리에 설립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고성향토사연구소장 하기호씨의 증언으로 정확한 위치를 확인했으며, 「고성군 철성면 덕선리 지적원도」를 통해 지번을 확인하였다. |














철성의숙 터
철성의숙 터 전경
철성의숙 터 주변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