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고성리 씨름장 항쟁지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민족주의독립운동 |
| 종류 | 기타 |
| 상태 | 멸실 / 현재 일부는 도로에 편입되고, 다른 일부는 갈대밭으로 변해있다. 과거 씨름장의 흔적은 남아있지 않다. |
| 정의 | 1927년 5월 16일 정의면 중앙청년회 주최로 열린 대운동회에서 정의면 청년들과 일본인 선원들이 씨름경기를 벌이다 싸움이 벌어진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
|---|---|
| 관련 조직 | 정의면 중앙청년회 |
| 관련 인물 | 고승운(高承雲), 한봉희(韓奉禧), 박군평(朴君平), 김영화(金永和), 황봉진(黃鳳辰), 고은삼(高殷三) |
| 관련 내용 | 1927년 5월 16일 제주도 정의면 중앙청년회(회장 고은삼)가 주최한 대운동회가 고성마을 씨름장(속칭 소금막)에서 열렸다. 이때 풍랑을 피해 성산포로 대피했던 일본어선 선원들이 씨름장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이들 대부분은 일본인 어부였다. 이들은 씨름경기에 참가해 경기를 하던 중 제주민에 대해 차별적인 언사와 강압적인 태도를 보이며 원활한 경기진행을 방해했다. 씨름경기에서 패한 일본인 어부가 심판을 보았던 정의면 청년의 뺨을 때리자 이에 격분한 500여 명의 정의면 청년과 200여 명의 일본어부(일부 외래인 포함) 사이에 집단 싸움이 벌어졌다. 이 일로 인해 일본선원 중 2명이 상해를 당하자 일제 경찰이 출동, 이를 진압한 다음 50여명의 정의면 청년들을 체포, 제주경찰서로 압송했다. 체포된 청년들은 1927년 8월 11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1년 이상의 징역형을 언도받았으나, 일본 어부들에 대한 처벌은 전혀 없었다. 1927년 12월 16일 광주지방법원과 1928년 12월 15일 대구복심법원 상고 결과 오조리의 고승운, 성산리의 한봉희, 온평리의 박군평, 종달리의 김영화, 시흥리의 황봉진 등이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았다. |
| 참고 문헌 |
「박몽주 등 71인 판결문」, 광주지방법원, 1927년 8월 11일. 「박몽주 등 50인 판결문」, 광주지방법원, 1927년 12월 16일. 「고은삼 등 12인 판결문」, 1928년 12월 15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중외일보』, 1927년 5월 20일, 「제주도 주민과 어부의 충돌」. 『신한민보』, 1927년 6월 16일, 「본국시사: 제주도 주민과 어부의 충돌, 두편의 사상자가 다수라고」. 오성찬, 『제주의 마을 시리즈-제주 동부의 핵심마을 고성리』, 도서출판 반석, 1987, 204~205쪽. 제주도지편찬위원회, 『제주항일독립운동사』, 제주도, 1996, 456~482쪽. 성산읍, 『성산읍지』, 2005, 304~312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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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전라남도 제주도 정의면 고성리 352 |
|---|---|
| 주소 | 제주 서귀포시 성상읍 고성리 352 일대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고은삼 등 12인 판결문」과 『중외일보』 1927년 5월 20일자 등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














고성리 씨름장 항쟁지 전경(2019)
고성리 씨름장 항쟁지 전경(2019)
고성리 씨름장 항쟁 관련기사『( 신한민보』, 1927. 6. 16)
고성리 씨름장 항쟁 관련기사『( 중외일보』, 1927. 5. 20)
고성리 씨름장 항쟁지 전경(2019)
고성리 씨름장 항쟁지 전경(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