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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천향교 - 의병탄압지

기본정보

기본정보
사적지 분류 등급분류 제외(항일운동)
운동계열분류 의병전쟁
종류 건물
상태 복원/ 1922년 소실된 대성전을 중수하였으며,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대성전·명륜당·동재·서재 등이 있다.
정의 1907년 제천의병에 대한 탄압으로 일제가 불태운 향교.

관련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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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건 천남전투
관련 조직 이강년 의진 
관련 인물 이강년(李康秊), 매켄지, 김의경(金義卿), 염도순(廉道淳)
관련 내용 제천에서 이강년 등이 의병활동을 치열하게 전개하자 일제는 의병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에 나섰다. 1907년 8월 천남전투에서 스에야스 소대가 패배하여 제천에서 쫓겨나면서 일제는 의병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에 나섰다. 일본군사령관 하세가와는 서울에 주둔하던 보병 51연대 제2대대장 아다치[足達] 중좌에게 제2대대와 제52연대 제2중대, 기관총 4정, 기병 제17연대의 1개 소대, 공병 제13대대의 1개 소대로 지대를 편성하여 의병을 토벌하도록 하였다.
1907년 8월 23일 오전 6시에 제천에 도착한 아다치 지대는 의병의 근거지이며 주민들이 의병을 비호한다는 이유로 민가를 모조리 소각하여 제천읍을 초토화시켰다. 여주 쪽에서 제천 부근에 이르는 길가의 마을과 박달재 부근의 마을도 모두 불태워졌다. 일본군은 관아를 비롯해 제천의 중심지를 남김없이 태웠다.
영국『런던 데일리 메일』 기자 출신인 매켄지(2014년 독립장)는 당시 소실된 제천 일원을 돌아보며 “제천은 지도 위에서 싹 지워져 버리고 말았다”고 할 정도였다. 당시 제천향교도 화마의 피해를 입어 대성전과 명륜당이 불에 타 없어져, 교생 김의경과 염도순이 위패를 두학동의 박약재로 옮겨 봉안하였다.
제천향교는『제주향교기(堤州鄕校記)』에 1590년(선조 23)에 장평리에서 현위치로 옮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1922년 소실된 대성전을 중수하였으며,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대성전·명륜당·동재·서재 등이 있다.
참고 문헌 「잡보」,『대한매일신보』, 1907년 9월 8일.
조선총독부, 「제천」,『근세한국오만분지일지형도』, 1918.
이정규,「육의사열전」,『독립운동사자료집』1-의병항쟁사자료집, 1971, 193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3, 1984, 193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3, 1984, 671~672쪽; 688쪽.
박민영,『의병전쟁의 선봉장 이강년』,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7, 108~115쪽.
F.A.매켄지 저・김창수 역,『朝鮮의 悲劇』, 1984, 172쪽.
구완회,『한말의 제천의병』, 집문당, 1997, 286~2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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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지역정보
당시 주소 충청북도 제천군 읍내면 읍부리
주소 충청북도 제천시 칠성로 교동 86(칠성로 117)
도로명 주소
위치 고증 「육의사열전」(六義士列傳)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제주향교기』(堤州鄕校記)를 통해 1590년(선조 23)에 장평리에서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음을 확인하였다. 1872년 지방지도와『근세한국오만분지일지형도』에도 해당 위치로 표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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