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주기효 집터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등급분류 제외(항일운동) |
|---|---|
| 운동계열분류 | 애국계몽운동 |
| 종류 | 가옥 |
| 상태 | 멸실 / 이전 건물은 볼 수 없고 새건물이 들어서 있다. |
| 정의 | 한말 사립학교 설립을 통한 계몽운동과 국채보상운동 등의 활동으로 구국운동을 전개한 주기효가 살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
|---|---|
| 관련 조직 | 사립개통학교/숙명의숙/도서원/일진회/국채보상단연동맹 |
| 관련 인물 | |
| 관련 내용 |
주기효(朱基孝, 1867~1940)는 주현욱(朱炫勖)의 장남으로 1867년 10월 6일 태어났다. 웅천현의 관리였던 아버지를 통해 서울의 소식을 접하게 되면서 근대 교육의 필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1902년 주사에 서임되나 곧 사임하고 상경하였다. 이후 서울의 사립학교와 선각자들을 방문하고 돌아와 웅천에 사립학교를 설립하였는데, 그것이 1906년 설립된 사립개통학교(私立開通學校)이다. 1907년에는 여학교인 숙명의숙(淑明義塾)을 세웠다. 그리고 향민에게 책을 무료로 빌려주는 도서원(圖書院)을 차려 향민의 교양 함양에도 힘썼다. 졸업생 중 유망한 제자 40여 명을 선발, 사재를 털어 유학을 시키는 등 민족지사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1914년 개통학교에 탄압이 가중되어 학교 경영이 어렵게 되자 상무조합에 운영을 일임하였고, 1917년에는 숙명의숙과 함께 웅천공립보통학교로 통합되었다. 주기효는 이러한 육영사업 뿐만 아니라 국권회복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0년 1월 웅천면민 347명이 동지회(同志會)를 조직해 일진회 규탄하는 글을 써 국민대연설회에 보낼 때 지방위원으로 참가하였다. 또한 국채보상단연동맹(國債保償斷煙同盟)을 조직하였고 실업진흥을 위해 실업조합·흥업조합 등을 발기하기도 했다. 이후 그는 밀양군 하남면 수산리로 이주하여 여생을 보내다 1940년 1월 사망하였다. |
| 참고 문헌 |
「토지대장」. 「폐쇄지적도」.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 「창원군 웅읍면 지적원도」, 1914. 『황성신문』, 1908년 2월 11일, 「웅천군 사립개통학교」. 『황성신문』, 1908년 11월 24일, 「주씨 청원」. 『황성신문』, 1910년 1월 15일, 「도처 성토」. 황정덕, 『진해지역의 항일독립운동사』, 금창출판사, 2004, 82~86쪽. 진해시사편찬위원회,『 진해시사』, 2004, 276~278쪽. 정교,『 대한계년사』 하, 국사편찬위원회, 1974, 347쪽. |
*좌표를 클릭하시면 '길찾기'로 연결됩니다.
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상남도 창원군 웅읍면 북부리 5통 8호 |
|---|---|
| 주소 | 경남 창원시 진해구 웅천동 509-1 |
| 도로명 주소 |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웅천로159번길 10-17 |
| 위치 고증 | 『황성신문』과 『대한계년사』 등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제적등본」을 통해 주기효의 주소지를 확인했으며, 「토지대장」과 「창원군 웅읍면 지적원도」 등을 통해 위치를 확인하였다. |














주기효 집터
주기효 집터 좌측면
주기효 집터 원경
주기효 집터 우측면
주기효 집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