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옛 홍릉 터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등급분류 제외(항일운동) |
|---|---|
| 운동계열분류 | 한말구국운동 |
| 종류 | 묘소 |
| 상태 | 부분변형 / 현재 산림청 임업연구원에서 관장하는 홍릉수목원이 들어서 있다. |
| 정의 | 1895년 10월 일본인 자객에게 시해당한 명성황후의 무덤이 있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1895.10.8 을미사변 |
|---|---|
| 관련 조직 | |
| 관련 인물 | 명성황후(明成皇后) |
| 관련 내용 |
1895년 10월 8일(음력 8월 20일)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일본인 자객에게 비참하게 시해당한 뒤에도 미우라 고로[三浦梧樓] 일본공사는 그 사실을 은폐한 채 고종에게 강요하여 왕비폐위조칙을 반포케 하였다. 그러나 명성황후 시해사건 당시 시위대를 지휘했던 미국인 교관 다이(W.M.Dye)와 궁궐에 있었던 러시아인 기사 사바틴(H.N.Sabatin)이 현장에서 목격한 사실을 폭로함으로써 사건의 진상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로 인해 국제여론이 비등하자, 궁지에 몰린 일본정부는 미우라 공사와 스기무라 후카시[杉村濬] 서기관을 비롯한 관련자 48명을 소환해 히로시마[廣島]감옥에 가두고 재판에 부쳤다. 김홍집(金弘集) 친일내각 또한 11월 26일 조칙으로 폐왕비를 복위시키고, 12월 1일 왕비의 승하 사실을 공표함으로써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일단락지었다. 그러나 국상이 치러진 것은 그로부터 2년 뒤인 1897년 11월에 이르러서였다. 1896년 2월 아관파천으로 친일개화파 정권이 무너진 후 국상이 무기한 연기되었기 때문이다. 1897년 10월 12일 환구단에 나아가 황제에 즉위한 뒤 이튿날 대한제국의 성립을 선포한 고종은 11월 5일 대행왕후 민씨를 명성황후로 추존하고, 11월 21일 청량리 홍릉(洪陵)에 안장하였다. 1899년 5월 17일에는 황제의 홍릉 행차를 돕기 위해 서대문에서 청량리를 잇는 전차가 가설되어 개통식을 가졌다.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덕수궁에서 승하하자, 그 해 3월 4일 경기도 남양주 금곡에 능을 조성하고 청량리의 명성황후 능도 옮겨와 합장으로 예장하였다. 능이 옮겨간 뒤 옛 홍릉 터에는 1922년 조선총독부 임업시험장이 설치되어 홍릉수목원이라는 이름으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
| 참고 문헌 |
『고종시대사』 4, 1897년 1월 3일조, 국사편찬위원회, 1970, 310쪽. 「대경성정도」(1936) ;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지도』, 2006, 60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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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
|---|---|
| 주소 |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207 |
| 도로명 주소 |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회기로 57 |
| 위치 고증 | 「대경성정도」(1936)에 청량리 북쪽으로 홍릉수목원으로 변한 옛 홍릉 터가 표기되어 있다. |














명성황후 홍릉 이장 사진
옛 홍릉 터 입구
홍릉수목원 입구에 설치된 표지석
옛 홍릉 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