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경성방송국 터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등급분류 제외(항일운동) |
|---|---|
| 운동계열분류 | 일제통치, 일제탄압, 일제수탈 |
| 종류 | 건물 |
| 상태 | 멸실 / 조선일보 정동별관이 들어서 있다. |
| 정의 | 1926년 12월 신축한 경성방송국 사옥이 있었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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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련 조직 | |
| 관련 인물 | |
| 관련 내용 | 경성방송국은 1926년 11월 30일 조선총독부 고시로 ‘사단법인 경성방송국 설립 및 방송무선전화 시설허가’를 받아 12월 11일 법인등기를 마치고 설립한 한국 최초의 방송국이다. 조선총독부는 1924년 11월 체신국에 무선실험실을 설치하여 첫 시험방송 전파를 발사한 뒤, 1925년 3월부터 정기 시험방송을 송출하는 단계를 거쳐 사단법인 경성방송국을 설립하고, 1927년 2월 16일 호출부호 ‘J.O.D.K’로 첫 본방송을 송출하였다. 개국 초기 단일채널에 일본어와 한국어를 3대 1 비율로 혼합한 양국어 혼합방송정책을 실시하다가, 1933년 4월부터 제1방송은 일본어, 제2방송은 한국어로 분리해 ‘이중방송’시스템을 구축하면서 라디오 대중화의 길을 열었다. 일제는 연희송신소를 준공해 출력을 1kW에서 10kW로 높이고, 1935년 부산방송국의 개국을 시작으로 전국 지방 주요도시에 16개의 지방방송국을 설치하는 한편, 수신기의 성능을 개량해 청취자의 수를 늘리면서 라디오 방송을 식민지정보통제와 동화·선전의 도구로 활용하였다. 그러나 조선인 청취자들은 그같은 보도·교양 프로그램보다 연예·오락 프로그램에 더많은 관심을 보였다. 그 결과 라디오 방송은 대중문화를 생산·유통시키는 매체로서 한국사회의 문화적 근대성 형성에 기여할 수 있었다. 경성방송국은 해방 후 9월에 서울중앙방송국으로 이름을 바꾸고 기구를 개편한 뒤, 몇 차례의 명칭과 기구변경을 거쳐 지금의 한국방송(KBS)이 되었다. |
| 참고 문헌 |
「대경성정도」(1936); 서울역사박물관, 『서울지도』, 2006, 58쪽. 『동아일보』, 1926년 12월 2일, 「신축된 방송국」 『동아일보』, 1926년 12월 24일, 「경성방송국: 완성된 방송국, 아직도 시험방송」 경성방송국편, 『JODK강연집』, 1927, 149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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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성부 정동정 1-11 |
|---|---|
| 주소 | 서울 중구 정동 1-16 |
| 도로명 주소 |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21길 33 |
| 위치 고증 | 「대경성정도」(1936)에 영국영사관 북쪽으로 경성방송국의 위치가 표기되어 있다. |














경성방송국
덕수초등학교에서 본 경성방송국 터와 첫방송터 기념비
경성방송국 첫방송터 기념비
프레스센터에서 본 경성방송국 터 - 현 조선일보 정동 별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