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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김만석 묘소

기본정보

기본정보
사적지 분류 등급분류 제외(항일운동)
운동계열분류 의병전쟁
종류 묘소
상태 변형 / 김만석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묘소로, 비석이 세워져 있다.
정의 1909년 3월 제주에서 의병활동하다가 순국한 김만석의 묘소가 있는 곳

관련정보

관련정보
관련 사건 1909 제주의병운동
관련 조직 제주의병 
관련 인물 김만석(金萬石)
관련 내용 제주읍 이도리 동광양 출신의 김만석(金萬石, 1885-1909)은 고사훈(高仕訓)이 1909년 2월 25일(음력 2월 6일)에 이도리 광양의 조인관(趙仁官)의 집에서 창의(倡義)의 구체적인 계획을 논의할 때 참가하였다. 당시 1909년 제주의병의 창의자는 모두 10명이었으며, 이 자리에서 거사 날짜를 1909년 3월 3일(음력 2월 12일)로 하고, 장소는 관덕정(觀德亭)으로 결정하여 창의에 필요한 격문과 통문을 작성했다. 제주도민들에게 격문과 통문을 사발통문으로 보내고 김만석은 고사훈·조인관·김재돌(金在乭)·양남석(梁南錫) 등과 함께 당일 대정에 가서 의병을 모집하여 제주성에 집결하면 이중심(李中心)·김석윤(金錫允)·노상옥(盧尙王)·김재돌·양남석·한영근(韓永根) 등이 제주성 안에서 호응, 기병을 하여 결전을 벌여 일본인들을 모조리 축출할 계획이었다.

이들은 영락리에서 100여 명, 신평리에서 100여 명 및 대정성 북문 밖의 마을에서 수십 명의 의병을 규합하고, 2월 28일에 대정군 중면 광청리에 집결하였다. 이에 제주경찰서 대정주재소는 3월 1일에 광청리 민가를 습격하여 고사훈과 김만석을 체포하였다. 3월 4일 오전 고사훈과 김만석은 서귀포주재소로 출발하려 할 때 포승을 끊고 감시하는 간수와 순사를 쓰러뜨리고 달아나다가 대정성 동문 밖 400-500m 지점에서 순사에 의하여 사살되어 순국하였다.
참고 문헌 「濟警秘發제36호의 5」,『暴徒에 관한 篇冊』, 경무국, 1909.
김동전, 「1909년 제주의병의 실상과 의의」, 『성주』5, 고씨종문회총본부, 1995, 171-183쪽.
제주도지편찬위원회,『제주항일독립운동사』, 제주도, 1996, 65-82·396-418쪽.
광복회 제주지부,『모충사의 항일독립운동 선열록』, 1999.
김찬흡,『제주항일인사실기』, 북제주군,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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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지역정보
당시 주소 제주군 대정면 안성리
주소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도로명 주소
위치 고증 『暴徒에 관한 篇冊』중「濟警秘發제36호의 5」에 따르면, ‘두사람(김만석, 고사훈)을 사살하고 시체는 그곳 원야(原野)에 가매장하였음’라고 기록되어 있다. 안성리 마을이장 김경수와 전 제주보훈청장의 안내로 비석과 묘를 확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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