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서울청년회 회관 터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사회운동 |
| 종류 | 건물 |
| 상태 | 멸실 / 현재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서울중앙교회와 서울중앙복음회관 건물이 들어서 있다. |
| 정의 | 화요회·북풍회와 더불어 사회주의 사상운동의 중요한 역할을 했던 서울청년회가 1925년 6월경부터 회관으로 사용했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
|---|---|
| 관련 조직 | |
| 관련 인물 | 김사국(金思國)/정백(鄭栢)/이영(李英)/오상근(吳祥根)/장덕수(張德秀)/김윤식(金允植) |
| 관련 내용 |
서울청년회는 1921년 1월 조선청년회연합회(1920.12.창립)의 지도권을 확보하려는 목적에서 오상근·장덕수 등 민족주의자들과 김사국·이영 등 사회주의자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청년운동단체였는데, 김윤식 사회장사건과 사기공산당사건을 계기로 이영·김사국·정백 등이 주도해 1922년 4월 민족주의자와 사기공산당사건 관련자들을 제명하고 청년회연합회에서 탈퇴하면서 사회주의 단체로 재편되었다. 사회주의자들의 당적 존재로 성격을 전환한 이후 서울청년회는 노동단체로 조선노농대회준비회(1923.9)와 사상단체로 사회주의자동맹(1924.12)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1923년 3월 전조선청년당대회를 주최한 데 이어, 1924년 4월 조선청년회연합회와 연합하여 화요회·북풍회계의 신흥청년동맹까지 망라한 청년단체의 전국적인 통일조직으로 조선청년총동맹을 창립하였다. 나아가 화요회·북풍회계의 조선공산당 창당 움직임에 맞서 1924년 10월 김사국을 책임비서로 하는 전위당 고려공산동맹을 결성하고, 1925년 10월 4단체합동 움직임에 맞서 전진회를 창립하여 화요회 중심의 조선공산당 세력과 사회주의 운동의 주도권을 놓고 치열한 다툼을 벌였다. 견지동 80번지는 이 당시 서울청년회의 회관이 있었던 곳이다. 서울청년회 회관은 1924년 2월 현재 와룡동 131번지에 있다가, 다음달 경운동 91번지로 이전한 것으로 보인다. 서울청년회가 견지동 80번지에 정착한 것은 1925년 6월경부터였다. 견지동 80번지 시천교당 입구 길거리에 연이어 들어서 있는 조선식 목조 2층 집 끝의 석탄광 2층 위가 조선소년총연맹이고, 그 다음에 간판 많은 건물 2층이 서울청년회였다. 시천교 소유의 이 건물에는 서울청년회 계열의 사상단체 사회주의자동맹과 전진회(前進會), 폭력단체 적박단(赤雹團), 청년단체 경성청년연합회 등이 함께 입주해 있었다. 조선물산장려회와 1925년 8월 조직된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1927년경부터 KAPF로 약칭) 또한 한때 여기에 있었다. |
| 참고 문헌 |
一記者, 「朝鮮物産 奖 勵會의 第一 寂寞하든 그 때」, 『조선물산장려회보』2, 1930, 2·75쪽. 一記者, 「2일 동안에 서울구경 골고로 하는 法」, 『별건곤』23, 1929. 61~62쪽. 백관수 편, 『경성편람』, 홍문사, 1929, 101쪽. |
*좌표를 클릭하시면 '길찾기'로 연결됩니다.
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성부 견지동 80 |
|---|---|
| 주소 | 서울 종로구 견지동 74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조선물산장려회보』2호에 실린 명제세의「조선물산장려회의 제일 적막하든 그때」라는 회고와『경성편람』(1929) 사회단체편에 해당 주소지와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














서울청년회 회관 터 - 현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서울중앙교회
서울청년회의 레닌 추도 기사(『동아일보』, 1925년 1월 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