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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합일학교 터

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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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지 분류 국내항일운동사적지
운동계열분류 문화운동
종류 건물
상태 멸실 / 학교 터는 그대로이나 건물은 신축되었다.
정의 1920년대 강화군민들이 힘을 합쳐 민족교육을 지켜낸 교육운동의 현장

관련정보

관련정보
관련 사건 강화 3·1운동
관련 조직 잠두의숙(蠶頭義塾), 강화잠두교회(江華蠶頭敎會) 
관련 인물 박능일(朴能一)/강흥석(康興錫)/최상현(崔尙鉉)/신효승/오영섭
관련 내용 합일학교(合一學校)는 1901년 미국인 감리교 선교사 조원시(趙元時, G.H.Jones)와 박능일 목사가 설립하였으며 강화 최초의 사숙(私塾)으로 시작하였다. 1909년 4년제로 인가받고 1923년 4월 신효승·최상현 두 사람의 노력으로 총 공사비 12,400원을 들여 2층 양옥을 신축하였다. 1924년 2월「신교육령」에 의해 6년제로 되었다.
1922년에는 감리교 선교회의 보조 중단으로 재정적인 위기를 맞기도 하였으나, 강화지역 주민들의 모금으로 학교를 운영하였다. 1933년에는 일제가 공립학교를 설립하여 압력을 가해 학교가 폐교될 위기에 처하자 교장으로 취임한 최상현이 자신의 재산 상당분인 18만여 평의 토지(당시 싯가 70,000원 상당)를 기부하여 확고한 재정기반을 갖추었다.
합일학교는 보창학교, 계명의숙과 함께 강화를 대표하는 사학이었다. 합일학교는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학생들에게 태극기를 보여주는 등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교육을 하였다. 이로 인해 교사인 강흥석이 일제 경찰에 불려가며 고초를 겪기도 하였다. 이 학교는 여학생과 유년교육에 앞장서 지역사회의 폭넓은 지지 기반을 갖고, 주민후원회와 확고한 재정 기반으로 투철한 항일민족정신을 주민들에게 전파하였다. 최상현 교장과 그 뒤를 이은 오영섭 교장은 모두 3·1만세운동에 참여하였던 인물들이다.
1946년 11월 백범 김구는 김주경을 만나기 위해 강화에 방문하였다. 김주경의 집 인근 합일학교에서 ‘김구선생’ 환영대회가 열렸고, 김구는 ‘홍익인간’휘호를 남겼다. 현재 김구의 휘호는 이범석의 ‘위국육재’ 휘호와 함께 교장실에 보관되어 있다.
참고 문헌 『동아일보』, 1933년 12월 8일자.「敎育界又一喜消息 維持難의 合一學校에 七萬餘圓(土地)을 喜捨, 債權數萬도 同時에 抛棄해, 江華 崔尙鉉翁의 壯擧//經營難에 빠져서 廢校地境도 數次, 대정 十一년에 최씨가 담당, 萬餘圓의 二層校舍建築//崔先生功勞는 永世로 記念 기념동상을 세우려 합니다. 敎務主任 康興錫氏談[寫: 合一學校][肖: 崔尙鉉]」
「最近 篤志家의 美擧」, 『삼천리』 7권 7호, 1935, 92∼93쪽.
경기도사편찬위원회, 『경기도항일독립운동사』, 경기도편찬위원회, 1995, 499쪽.
경기도사편찬위원회, 『경기도사』 6-한말, 경기도편찬위원회, 2004, 403쪽.
김형목, 「강화도 사립 합일학교의 근대교육사에서 위상」, 『인천학연구』29,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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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지역정보
당시 주소 경기도 강화군 부내면 신문리
주소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합일길 3
도로명 주소
위치 고증 합일학교는 1901년 잠두교회(현 강화중앙교회)에서 설립한 잠두의숙에서 출발하였다. 현재는 공립 합일초등학교로 운영되고 있다. 또한 현재 교정에는 일제강점기 학교를 유지하는데 크게 공헌한 최상현 선생의 동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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