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춘천의병 전투지 - 약사원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의병전쟁 |
| 종류 | 산야 |
| 상태 | 변형 / 당시 격전을 펼쳤던 약사고개에는 죽림동성당이 자리하고 있으며, 당시의 흔적을 찾기 어렵다. |
| 정의 | 을미 춘천의병의 격전지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
|---|---|
| 관련 조직 | |
| 관련 인물 | 이진응(李晉應), 이경응(李景應), 유중락(柳重洛), 이만응(李晩應) |
| 관련 내용 |
약사원 격전을 이끌었던 이진응(李晉應)은 의병장 이소응(李昭應)의 사촌형으로 강원도 춘천 출신이다. 1896년 1월 20일 유중락(柳重洛)·이만응(李晩應) 등이 중심이 되어 일대의 유림과 평민 천여 명이 춘천부에 모여 이소응을 의병장으로 추대하였다. 이때 이진응은 이경응(李景應)과 함께 의병부대에 합류한 것으로 보인다. 이소응의 춘천의진은 각지로 격문을 보내어 ‘왜노(倭奴)’들에 대하여 ‘선참후보(先斬後報)’할 것을 강력히 촉구함으로써 적극적인 척왜(斥倭)운동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였다. 이때 정부에서 조인승(曺仁承)을 춘천부관찰사 겸 선유사로 파견하자, 춘천의진은 그를 왜노로 간주하여 처형하였다. 이에 충격을 받은 조정에서는 1개 중대의 병력을 춘천으로 파견하였다. 춘천의진은 서울진격을 목표로 가평방면으로 이동하였다. 그러다가 춘천과 가평의 접경인 보납산에서 관군의 공격을 받고 다시 춘천으로 퇴각하였다. 춘천의병은 날씨 때문에 화승총을 사용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훈련이 부족하고 전술·전략에 익숙치 못한 관계로 관군에 패하였다. 벌업산 전투에서 패전한 춘천의병은 춘천부로 퇴각하여 약사원 뒷산에 자리를 잡았다. 춘천의병장 이소응은 의진을 이진응에게 위임하고 병기와 포군을 보충하기 위해 지평군수 맹영재(孟英在)를 찾아가서 원병을 요청하였다. 이소응이 춘천의진을 떠난 사이 관군이 공격해 왔다. 관군에게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던 춘천의병은 2월 8일 관군이 경군과 합세하여 의병진을 공격해오자 패산(敗散)하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의병장 이진응은 관군에 의해 전사하였다. |
| 참고 문헌 |
『習齋集』, 권55. 이경응,『李景應實記』, 필사본. 壽春山人, 『별건곤』제28호, 「關東兵亂 치르던 이약이」, 1930년 5월 1일. 壽春山人, 『개벽』신간 제1호, 「丙申丙亂, 關東民兵亂祕話」, 1934년 11월 1일.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1-의병항쟁사, 1970, 166~167쪽. 오영섭,「춘천지역의 을미의병운동」,『북한강유역의 유학사상』, 한림대 아시아문화연구소, 1998. 이구용,「춘천의병의 항일투쟁」,『춘천항일독립운동사』, 춘천문화원, 1999, 54-55쪽. 오영섭, 「한말 춘천지역 의병항쟁의 역사적 의의」, 『강원문화사연구』 7, 강원향토문화연구회, 2002, 137~164쪽. 박민영, 「제천·강릉·춘천의병의 상호관계에 대한 검토(1895~6)」, 『청계사학』 16·17, 청계사학회, 2002, 903~920쪽. 의암학회, 『윤희순의사자료집』, 2008, 27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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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강원도 춘천군 부내면 약사원리 |
|---|---|
| 주소 | 강원도 춘천시 약사고개길 21 일대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習齋集』권55, 병신년 정월 5일조에 이진응 부대와 일본군이 펼쳤던 약사리 격전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다. |














약사고개 전경(2021년 촬영)
1960년대 남부로타리~약사리고개
약사고개 전경(2021년 촬영)
약사고개 전경(2021년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