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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구마모토농장 화호지장

기본정보

기본정보
사적지 분류 등급분류 제외(항일운동)
운동계열분류 일제수탈
종류 건물
상태 변형 / 농장장 가옥을 중심으로 여러 채의 일본인 직원 사택이 있으며, 그 가운데 일부는 거의 원형을 보존하고 있지만 일부는 멸실되기도 하였다.
정의 구마모토농장 화호지장 농장장이 거주하던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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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내용 일본 나가사키현[長崎縣] 출신으로 게이오의숙[慶應義塾]에 재학중이던 구마모토 리헤이[熊本利平]는 해외 진출의 꿈을 가지고 구한말 조선으로 시찰을 왔다. 조선 각지를 여행하다 호남 일대가 농지 개발의 적지임을 간파한 그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출자금을 받아 전북 옥구 일대의 토지를 매입하였고, 1903년 10월에는 독립하여 자신의 이름을 딴 농장을 개설하였다. 그는 전북에 진출한 최초의 일본인 지주로 알려져 있다.

1932년경 구마모토가 전북 각지에 소유한 농지는 약 3,500정보로서 국책회사인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제외하고 전북 최대의 지주였던 셈이다. 5개 군 26면에 분포된 그의 농장은 1본장, 3지장, 1분장으로 나누어서 관리되었다. 개정본장·지경지장·대야지장에서 관리하는 토지가 약 1,300정보, 화호지장(禾湖支場)에서 관리하는 토지가 약 1,800정보, 전주분장의 관리 토지가 약 90정보 규모였다. 곧 정읍에 위치한 화호분장의 토지가 가장 많았는데, 구마모토는 화호에 농장사무실, 대형 창고 5동, 관리인 사택, 진료소 등을 두고 다수의 소작농을 고용하여 농장을 경영하였다.

구마모토는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소작인들 대상으로 다수확경진을 붙이는가 하면, 생산량의 45%의 소작료를 거두어 들였다. 또한 소작인들에게 수리조합비를 부담시켜 소작인들의 불만이 폭증하였다. 그 결과 1934년 화호농장 소작인 400여 명이 소작료 인하를 요구하는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총독부와 농장측이 자신들의 요구를 묵살하자 소작농들은 1935년 5월 재차 소작료 인하를 요구하였고, 같은 해 11월에도 소작농 1,200명이 소작료 납부를 거부하는 항쟁을 하였다.
참고 문헌 東洋拓植株式會社,『東洋拓植株式會社二十年誌』, 東洋拓植株式會社, 1928, 37∼41쪽.
『동아일보』, 1935년 5월 8일, 「禾湖熊本農場에 小作爭議 再燃」.
『동아일보』, 1937년 11월 23일, 「熊本農場 」.
이영춘, 『나의 교우록』, 쌍천이영춘박사기념사업회, 2004, 42쪽.
소순열, 「일제하 조선에서의 일본인 지주경영의 전개와 구조-몇 가지 지주경영 사례를 통하여」,『 한국농업사학회』4-1, 2005, 108쪽.
20세기민중생활사연구단,『20세기 화호리의 경관과 기억』, 눈빛, 2008, 31∼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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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지역정보
당시 주소 전라북도 정읍군 용북면 화호리 766-2
주소 전북 정읍시 신태인읍 화호리 766-2
도로명 주소
위치 고증 『동아일보』1935년 5월 8일자 기사와 1937년 11월 23일자 기사에 구마모토농장 화호지장 소작인들의 소작료 인하투쟁에 관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화호지장 농장장이 거주하던 가옥은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정확한 위치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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