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조성환 생가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해외독립운동가 국내사적지 |
| 종류 | 가옥 |
| 상태 | 원형보존 / 현재 중요민속자료 제126호 김영구 가옥으로 지정되어 있다. |
| 정의 |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국무위원과 군무부장 등을 역임한 조성환이 태어난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
|---|---|
| 관련 조직 | 신민회/대한민국임시정부/대한군정부/북로군정서/신민부/성동사관학교/한국유일독립당북경촉성회/한국광복전선/한국광복군 |
| 관련 인물 | 서일(徐一)/김좌진(金佐鎭) |
| 관련 내용 |
조성환(曺成煥, 1875~1948)은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출신으로 군 부패 개혁을 주도하다 사형선고를 받기도 했다. 1906년 신민회를 조직한 뒤 1907년 1월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1912년 일본 총리대신 카쓰라[桂太郞] 암살계획을 세웠으나 사전에 발각, 체포되어 거제도에 1년간 유형되었다.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군무부 차장, 1919년 4월 노령지역 대표의원으로서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과 군무부 위원이 되었다. 1919년 8월 7일 만주에서 서일·김좌진 등과 함께 대한군정부를 조직하고, 12월 북로군정서로 개편하여 군사부장에 취임하고 청산리전투에 참가하였다. 1925년 신민부 외교위원장이 되고, 성동사관학교의 고문으로 독립군 양성에 노력하였다. 1926년 한국유일독립당 북경촉성회를 조직하고 1927년 상해에서 개최된 각지 촉성회연합회 북경대표로 참가하였다. 1931년 임시의정원 경기도위원, 1934년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에 피선되었다. 1936년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 겸 군무총장이 되었으며, 1937년 한국광복전선 결성에 참가하고, 193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에 피선되었다. 같은 해 11월 임시정부 군사특파단장으로 시안[西安]에 파견되어 한국광복군 창설에 기여하였다. 1941년 대원수부의 막료로 군무부장에 임명되었고, 다시 최고원수부의 판공처장에 임명되었다. 1945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귀국한 뒤 한국장교단장, 대한독립총회위원장, 성균관부총재 등을 역임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현재 김영구 가옥으로 지정되어 있는 이 집은 조성환의 아버지 조병희가 독립군자금 마련을 위해 재산을 매각하면서 같이 매각하였다고 한다. |
| 참고 문헌 |
여주군사편찬위원회, 『여주군사』 2, 2005, 505~506쪽. 「요시찰 조선인에 관한 건」, 1916년 2월 28일, 『불령단관계잡건-조선인의 부-재지나각지』 1, 1916;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왜정시대인물사료』 6,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양태석, 「청사 조성환(1875~1948)의 항일독립운동」, 서강대 석사학위논문, 2008 황선익, 「조성환을 통해 보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의 가족사와 장의」『한국학논총』54, 국민대, 2020. 김희곤, 『조성환』,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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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기도 여주군 대신면 보통리 |
|---|---|
| 주소 | 경기 여주군 대신면 보통1길 98(대신면 보통리 190-2)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왜정시대인물사료』 6권에 의하면, 원적이 경성부 낙원동 124번지로 기록되어 있으나 「요시찰 조선인에 관한 건」에는 본적이 경성부 동부 연동 49통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여주군 대신면 보통리 창녕조씨 후손들에 의하면, 조성환은 현재의 여주군 대신면 보통리 190-2번지에서 태어나 살다가 서울로 올라가 활동하였다고 한다. |














조성환과 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