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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백낙열 집터

기본정보

기본정보
사적지 분류 국내항일운동사적지
운동계열분류 3·1운동
종류 가옥
상태 멸실 / 새로 집을 개축하여 현재는 백낙렬의 후손이 살고 있다.
정의 1919년 4월 수원군 장안면·우정면 일대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한 백낙렬이 살던 곳

관련정보

관련정보
관련 사건 1919.4.1 수원군 장안면·우정면 봉화시위, 1919.4.3 수원군 장안면사무소 독립만세시위, 1919.4.3수원군 쌍봉산 독립만세시위, 1919.4.3 수원군 우정면사무소 독립만세시위, 1919.4.3 수원군 화수리경찰관주재소 독립만세시위
관련 조직  
관련 인물 김성렬(金聖烈), 안종후(安鍾厚), 차희식(車喜植), 김흥렬(金興烈)
관련 내용 백낙렬(白樂烈, 1865~1937)은 수원군 장안면 수촌리 사람으로 한학을 배우며 농사를 지었다. 1885년 동학에 입교하여 천도교 남양교구 금융원으로 활동하였고, 1919년에는 남양교구 순회교사와 함께 수촌리 구장직을 맡고 있었다.

백낙렬은 천도교측의 3·1운동 준비과정에서 고주리 김성렬(金聖烈), 제암리 안종후(安鍾厚) 등과 함께 지역대표로서 서울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이후 수촌리로 돌아온 백낙렬은 이곳 주민에게도 3·1운동의 기운을 전파하고자 하였다. 이에 주변의 천도교 전교실(傳敎室)을 순회하며 천도교인들을 중심으로 만세시위를 준비하는 한편 차희식(車喜植)·김흥렬(金興烈) 등과 거사를 논의하였다.

1919년 4월 1일 일어난 장안면·우정면 지역 봉화시위와 4월 3일과 4일 양일 간 전개된 장안면·우정면 지역 만세시위 때 그는 시위대를 주도하여 장안면사무소와 쌍봉산, 우정면사무소, 화수리경찰관주재소 등을 습격하였다.

일본군의 보복이 시작되자 백낙렬은 바로 피신하였으며 그의 집은 일본군의 방화로 안채를 제외하고 모두 불타버렸다. 계룡산에서 3년간 피신하다 수촌리로 돌아온 백낙렬은 일제 경찰의 눈을 피해 다시 고주리의 한 암자에서 10여 년을 은거하였으나 결국 병을 얻어 1937년 1월 4일 사망했다. 2002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참고 문헌 「백낙렬 공적조서」,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김현묵 등 27인 판결문」, 1920년 12월 9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김선진, 『일제의 학살만행을 고발한다』, 미래문화사, 1983, 132~135쪽.
화성시·수원대학교 박물관, 『화성지역 3·1운동 유적지 실태조사보고서』, 화성시, 2003, 268~269쪽.
박환, 「수원군 우정면 화수리 3·1운동의 역사적 성격」, 『한국학』27,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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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지역정보
당시 주소 경기도 수원군 장안면 수촌리 729
주소 경기도 화성시 장안면 방축말길 58(수촌리 729-1)
도로명 주소
위치 고증 「김현묵 등 27인 판결문」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으며, 「백낙렬 공적조서」에 당시 주소지가 기록되어 있다. 『화성지역 3·1운동 유적지 실태조사보고서』의 위치 고증을 참고하여 현재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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