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구연영 집터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의병전쟁 |
| 종류 | 가옥 |
| 상태 | 멸실 / 현재 고철 재활용장으로 남아있다. |
| 정의 | 한말 의병장으로 남한산성 연합의명진에 참여하고 계몽활동에 주력하다가 순국한 구연영(具然英)의 생가 터이다.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의병운동 |
|---|---|
| 관련 조직 | 이천수창의소(利川首倡義所) |
| 관련 인물 | 김하락, 조성학, 김태원 |
| 관련 내용 |
구연영(具然英, 1864.06.20.~1907.07.16.)의 자는 춘경, 본관은 화순군 능성, 구철조의 3남으로 경기 광주 사람이다. 서울에서 출생하였으나, 그는 집안이 대대로 세거해온 경기도 광주에 정착해 살았다. 1895년 8월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11월에 단발령을 공포하자 구연영은 1895년 12월 31일 김하락, 조성학, 김태원 등과 함께 경기도 이천에서 이천수창의소(利川首倡義所)를 결성하였다. 1896년 1월에는 이천의 백현(魄峴)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여 승리를 거두었고, 2월 12일 두번째 전투인 이현(梨峴)전투에서 일본군과 접전끝에 패퇴한 이천수창의소 의병진은 전열을 재정비하여 2천여 명으로 군세를 증강한 후 심진원의 광주의진, 이석용의 양근의진과 함께 남한산성을 공략, 입성하였다. 관군의 공격으로 1896년 3월 남한산성이 함락되자 구연영의 의진은 경북 의성으로 이동하여 재기를 도모하였으나 그는 동년 4월 의진과 결별하고 이천으로 돌아왔다. 이후 그는 1897년 기독교에 입문하여 1898년 서울 상동교회(尙洞敎會)에서 웹엣청년회를 조직, 항일민족의식을 고취하였으며 1902년에는 전도사로서 이천을 중심으로 포교활동에 전념하였다. 1907년 정미의병이 일어나자 구연영은 수십명의 동지와 함께 구국회를 조직하고 매국단체 일진회를 성토하며 항일투쟁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등 구국계묭활동을 폈다. 또한 이천, 여주, 광주 일대를 순회하며 상인들의 철시투쟁을 유도하는 등의 활동을 계속하던 중 1907년 7월 16일 일본군 수비대에 의해 피체되어 아들인 구정서와 함께 피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 참고 문헌 |
「구연영 공적조서」,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광주군지편찬위원회,『광주군지』, 광주군, 1990, 1403쪽. 경기도사편찬위원회,『경기도항일독립운동사』, 경기도, 1995, 18쪽. 박민영, 「이달의 독립운동가 구연영-을미의명의 쾌거, 구국계몽운동으로 꽃피우다-」(구연영 선생 공훈선양 학술강연회), 2014. 유한철, 「김하락의진의 의병활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2, 1989. 김순권, 『경기지역 의병운동연구』, 한양대 박사학위논문, 2002. |
*좌표를 클릭하시면 '길찾기'로 연결됩니다.
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기도 광주군 도척면 궁평리 73 |
|---|---|
| 주소 | 경기도 광주시 도척면 궁평리 73-1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구연영 공적조서」에 의거하여 당시주소를 확인할 수 있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