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김규식 생가 터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해외독립운동가 국내사적지 |
| 종류 | 가옥 |
| 상태 | 밭으로 활용되다가, 지금은 도로 공사가 진행 중이다. |
| 정의 | 북로군정서·대한독립군단·고려혁명군 등에서 활동한 김규식의 집 터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청산리전투 |
|---|---|
| 관련 조직 | 대한군정부(大韓軍政府),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사관연성소(士官鍊成所),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 고려혁명군(高麗革命軍) |
| 관련 인물 | 김규식(金奎植) |
| 관련 내용 |
김규식(金奎植)은 대한제국 시위대 부교(副校)·육군연성학교(陸軍硏成學校) 조교 등으로 재직 중 1907년 8월 군대가 해산되자 의병투쟁에 합류하였다. 강원도 철원으로 가서 해산된 군인들을 규합하여 의병운동을 일으켜 철원과 양주를 근거지로 일본군과 4차례나 접전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이후 노령(露領)으로부터 무기를 구입하려하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19년 8월 김규식은 대한군정부(大韓軍政府)의 중심인물로 활약하다가 그해 12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가 조직되자 사단장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왕청현(汪淸縣) 십리평(十里坪)에 세운 단기속성사관학교인 사관연성소(士官鍊成所) 교관으로 복무하며 청년교육에도 힘썼다. 1920년 청산리전투에서는 보병대 대장으로 활약하여 대첩을 거두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같은 해에 밀산(密山)에서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이 편성되자 총사령관이 되었다. 자유시참변(自由市慘變) 이후 망명군을 재편성하는 한편, 독립사상 함양에 진력하였다. 1923년 연길현(延吉縣)에서 이범석 등과 고려혁명군(高麗革命軍)을 조직하여 총사령관으로서 영농과 군사훈련을 강화하여 일제와의 전투에 대비해 나갔다. 1925년 신민부(新民府)에서 활동하였고, 1926년에는 고려혁명당 중앙위원으로 선정되었다. 그 후 동포의 교육을 위해 노력하다가 1931년 3월 공산당원에게 피살되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
| 참고 문헌 |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김규식 공적조서」 金正明, 『朝鮮猖立運動』 Ⅲ, 原書序, 1967, 383, 396, 416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 1, 1970, 485쪽. 국사편찬위원회,『한민족독립운동사』 1, 1987, 431~433쪽. 박걸순, 『구한말 의병장 한봉수의 항일투쟁』, 한봉수의병장동상건립추진위원회, 1995. 구리시지편찬위원회, 『구리시지』 상, 구리시, 1996, 1049~1050쪽. 구리시, 『구리의 역사와 문화』, 1996, 78, 279쪽. 이이화, 「김규식의 출신배경과 가계에 관한 고찰」, 『노은 김규식과 항일독립운동』 학술발표회, 구리시, 2004, 14~30쪽. 서태원, 「갑오개혁 이후 충청북도 지방군-청주지방대와 진위대를 중심으로」, 『한국사연구』 136, 한국사연구회, 2007, 279~280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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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 사노리 281 |
|---|---|
| 주소 |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로 389번길 42-17일대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국외에서의 용의조선인명부』에 본적이 양주군 구리면 사노리 281번지로 기록되어 있다. 박명섭(구리문화원, 구리시향토사연구소장)의 증언을 통해 현재의 위치를 확인하였다. |














김규식 생가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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