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이종암 생가 터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의열투쟁 |
| 종류 | 가옥 |
| 상태 | 멸실 / 새로운 가옥이 들어 서 있다. |
| 정의 | 1919년부터 의열단원으로 활동하다가 1925년 체포된 이종암이 태어난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1917.12 대구은행 자금탈취사건/1922.3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저격사건 |
|---|---|
| 관련 조직 | 신흥무관학교/의열단 |
| 관련 인물 | 서상락(徐相洛)/김성근(金聲根)/김원봉(金元鳳)/이성우(李誠宇)/황상규(黃尙奎)/김익상(金益相)/오성륜(吳成崙)/신채호(申采浩)/이병호(李丙浩)/이병태(李丙泰)/이기양(李起陽) |
| 관련 내용 |
이종암(李鍾巖, 이명 李鍾淳·梁健浩, 1896~1930)은 1917년 만주를 왕래하며 독립운동에 뜻을 둔 동지들과 함께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다. 같은 해 12월 자신이 근무하던 대구은행 금고에서 은행돈 1만 9천원을 독립운동자금으로 탈취하여 미국으로 건너가고자 하였으나 제1차 세계대전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만주로 갔다. 1918년 2월 통화현(通化縣)의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였다. 1919년 3·1만세운동이 발발하자 독립운동에 뛰어들기 위해 교관 서상락(徐相洛) 등의 동의를 얻어 학교를 그만두었다. 이어 그는 1919년 상하이[上海]에서 김성근(金聲根)으로부터 폭탄제조법을 배우고, 김원봉(金元鳳)·이성우(李誠宇)·황상규(黃尙奎) 등과 함께 의열단을 조직하였다. 1920년에는 폭탄을 조선으로 들여와 일본 각 기관 파괴를 기도하였으나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1922년 3월 그는 김원봉·김익상(金益相)·오성륜(吳成崙) 등과 함께 필리핀에서 상하이로 오는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을 처단하고자 하였으나 불행하게도 암살은 실패하고 김익상·오성륜 등이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1925년 9월 그는 재정사정의 궁핍으로 활동이 힘들어지자 국내에서 군자금을 모집할 계획을 세우고, 신채호(申采浩)가 작성한 의열단선언서인 조선혁명선언서를 가지고 대구로 잠입하였다. 이병호(李丙浩)의 안내로 이병태(李丙泰)를 만나 자신이 전에 부산금융조합에 예금한 돈을 받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때 이미 일제 경찰의 추적을 받았고, 그가 잠시 요양중이던 달성군 달성면 이기양(李起陽)의 산장에서 1925년 11월 5일 경찰에게 체포되고 말았다. 1926년 12월 2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3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루던 중 1930년 6월 10일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
| 참고 문헌 |
「이종암 등 9인 판결문」, 1926년 11월 2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이종암 등 3인 판결문」, 1926년 12월 28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동아일보』, 1926년 11월 11일, 「경북중대사건의 기일, 의열단 전후 활동 진상, 과거 칠년간 관계자 전후 삼십여명, 만일주년만에 해금된 양건호사건」. 朝鮮總督府 陸地測量部, 「大邱地籍圖」, 1927(대구향토역사관 소장).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7, 1976, 517쪽. |
*좌표를 클릭하시면 '길찾기'로 연결됩니다.
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상북도 대구부 남산정 621 |
|---|---|
| 주소 | 대구 중구 남산2동 621-1 |
| 도로명 주소 | 대구광역시 중구 문우관길 30-26 |
| 위치 고증 | 「이종암 등 9인 판결문」·「이종암 등 9인 판결문」 및 『동아일보』 1926년 11월 11일자 등에 관련 사실과 당시 주소지가 기록되어 있다. 1927년 발행된 「대구지적도」를 통해 위치를 확인하였다. |














이종암 재판 관련기사(『동아일보』, 1926년 12월 20일)
이종암 관련기사(『동아일보』, 1926년 12월 11일)
이종암 생가 터 대문
이종암 생가 터
이종암 생가 터 우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