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이한구 집터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의병전쟁 |
| 종류 | 가옥 |
| 상태 | 멸실 / 옛 모습은 사라지고 밭으로 변해 있다. |
| 정의 | 1906년부터 1907년 9월 산남의진에서 활동하다가 입암전투에서 순국한 이한구가 살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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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련 조직 | |
| 관련 인물 | |
| 관련 내용 |
이한구(李韓久, 1870~1907)는 이제구(李制久)로 불리기도 하였다. 호는 지포(芝圃), 자는 한유(漢有)이다. 그는 1905년 정용기(鄭鏞基)와 협의하여 1906년 3월 동대산(東大山)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의병부대 이름은 산남의진(山南義陣)이라 하였다. 곧이어 신돌석(申乭石)의병을 돕기 위해 영해(寧海)로 북상하던 중 경주진위대의 간사한 꾀에 속아 대장 정용기가 체포되자, 그는 중군장(中軍將)으로서 의병진영을 재편성한 후 각지에서 전투를 벌였다. 강구(江口)에 이어 청하(淸河)를 습격하고자 의병을 이끌고 청하 덕성리(德星里)를 지나던 중 일본군의 공격을 받았으나 전투 끝에 물리쳤다. 그러나 대장 정용기의 체포 이후 신돌석의진도 패하였으며, 일본군의 배치가 계속 확대·강화되고 있던 상황에서 항전을 이어갈 수 없어 후일을 기약하고 의병을 해산하였다. 1907년 이한구는 감옥에서 풀려나 재기(再起)를 꾀하던 정용기와 더불어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이들은 청송(靑松) 신성(薪城)으로 의병진영을 옮기던 중 일본군의 급습을 받았지만, 격전 끝에 이를 물리쳤다. 또 자양(紫陽)전투에서 일본군의 분파소장(分派所長)을 생포하고 일본군 3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1907년 9월 11일 죽장 입암(立岩) 전투에서 대장 정용기 등과 함께 순국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
| 참고 문헌 |
송상도,『기려수필』, 국사편찬위원회, 1955, 142쪽. 「자료 Ⅱ 산남창의지(하)」,『한국독립운동사연구』4,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0, 582-592쪽. 권영배,「산남의진(1906~1908)의 조직과 활동」,『역사교육논집』16, 역사교육학회, 1991, 136-137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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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상북도 청하군 죽남면 지평리 |
|---|---|
| 주소 | 경북 포항시 |
| 도로명 주소 |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죽장면 포은로2599번길 4-17 |
| 위치 고증 | 『기려수필』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후손 이우원의 증언과「제적등본」을 통해 위치를 확인하였다. |














『기려수필』(송상도, 1955)
이한구 집터 정면
이한구 집터 후면
이한구 집터 전경
이한구 집터 우측
이한구 집터 좌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