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박희광 생가 터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해외독립운동가 국내사적지 |
| 종류 | 가옥 |
| 상태 | 멸실 / 현재 밭으로 변해 있다. |
| 정의 | 일제시기 대한통의부 대원으로 친일파를 처단한 박희광이 태어난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1924.초 일본 고등계 첩자 사살/1924.6 보민회 간부 사살 |
|---|---|
| 관련 조직 | 대한통의부/보민회/일민단/조선인민회 |
| 관련 인물 | 김광추(金光秋)/김병현(金炳賢) |
| 관련 내용 |
박희광(朴喜光, 이명 朴相萬, 1901~1970)은 선산군 상고면 봉곡동에서 태어났다. 1912년 만주로 망명한 후, 1922년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에 가입하여 제5중대에서 항일운동을 펼쳤다. 당시 봉천성(奉天省)에는 일제의 친일단체인 보민회(保民會)와 일민단(日民團) 등이 독립운동과 동포들의 단합을 방해하고 있었다. 그는 대한통의부의 명령에 따라, 김광추(金光秋)·김병현(金炳賢) 등과 함께 이들의 숙청작업을 담당하였다. 1924년 초에는 일제의 고등계 첩자이며 조선인민회 서기인 정갑주(鄭甲周) 부자를 살해했으며, 같은해 6월에는 만주에서도 가장 악질적인 친일파 거두인 보민회 회장 최정규(崔晶奎)의 집을 습격하여 그의 장모와 보민회 서기 박원식(朴原植)을 사살하였다. 같은 해 그는 군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김병현과 함께 활동하다 중국 경찰에 붙잡혀 일본 경찰에게 인도되었다. 대련지방법원을 거쳐 여순고등법원에서 징역 20년형을 선고받고 여순감옥에서 15년간 옥고를 치렀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
| 참고 문헌 |
「박희광 공적조서」,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崔晶圭를 襲擊한 不逞鮮人에 關한 件」, 1924년 6월 11일,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在滿洲의 部(39)』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동아일보』, 1925년 8월 31일, 「만철연선일대의 친일파토벌 대사건(1), 사건 경개와 공판전기」. 『동아일보』, 1925년 9월 1일, 「친일파토벌사건공판기(2), 총살동기는 운동방해, 군대의 필요는 고토회복」. 『동아일보』, 1925년 9월 2일, 「친일파토벌사건공판기(3), 의열단 판의단과도 연락, 총살계획은 상사명령」.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14, 1978, 930·932쪽. |
*좌표를 클릭하시면 '길찾기'로 연결됩니다.
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상북도 선산군 상고면 봉곡동 |
|---|---|
| 주소 | 경북 구미시 봉곡동 171-1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박희광 공적조서」 및 『동아일보』 1925년 8월 31일자, 9월 1일자, 9월 2일자 등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으며, 「박희광 공적조서」에 당시 주소지가 수록되어 있다. 후손 박정용의 증언과 전정중의 증언을 통해 위치를 확인하였다. |














박희광 관련기사(『동아일보』, 1925년 8월 31일)
박희광 생가 터 후면
박희광 생가 터 우측
박희광 생가 터 전경
박희광 생가 터 좌측
박희광 생가 터 원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