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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권영만 집터

기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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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지 분류 국내항일운동사적지
운동계열분류 국내독립운동
종류 가옥
상태 멸실 / 권영만의 집은 없어지고, 빈터만 남아 있다.
정의 대한민국임시정부 후원단체인 주비단에서 활동한 권영만이 체포될 당시에 살던 집이 있던 곳

관련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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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건
관련 조직 광복회/대한민국임시정부/주비단 
관련 인물 우재룡(禹在龍)/한훈(韓焄)/소진형(蘇鎭亨)/이재환(李載煥)/김규일(金圭一)/장응규(張應圭)/심영택(沈永澤)
관련 내용 권영만(權寧萬, 1877∼1950)은 1907년에 의병항쟁을 펼쳤으며, 1915년 8월에는 광복회(光復會) 결성에 참여하였다. 1915년 12월 우재룡과 함께 경주에서 영덕·영일 방면으로 가는 우편차를 습격하여 8,700원의 세금을 광복회 활동 자금으로 확보하였다.

1918년 초 광복회 조직이 드러나자 한훈·우재룡 등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였다.

귀국 후인 1919년 음력 8∼9월경 우재룡·소진형·이재환과 함께 전국 부호를 대상으로 군자금을 확보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원할 것을 협의하였다. 이들은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군정서 명의의 군자금모집 요구장 19통을 작성하여 논산군 부호들에게 우송하였다. 논산의 부호로부터 거액의 군자금을 모은 권영만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원 김규일에게 전달하였다.

1920년 음력 2월 군자금 모집활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동지 장응규를 상하이[上海]로 파견하였다. 장응규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명을 받고 국내에 주비단(籌備團)을 조직하기 위해 귀국하였다. 같은해 음력 6월 서울 연지동 경신학교 교정에서 심영택을 단장으로 주비단이 결성되었다. 권영만도 여기에 참가하여 활동을 이어 가던 중 1920년 6월 일경에게 붙잡혀 1922년 4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8년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 문헌 「권영만 신문조서」;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32, 1997, 258∼263쪽.
『동아일보』, 1927년 9월 16일, 「권영만씨 출옥」.
『중외일보』, 1928년 9월 14일, 「권영만씨 압송」.
경상북도경찰부,『고등경찰요사』, 1934, 204∼206·269∼270쪽.
김희곤,『박상진자료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0, 229∼24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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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지역정보
당시 주소 경상북도 영양군 입암면 병옥리 20
주소 경북 청송군 진보면 광덕1리 351-3
도로명 주소 경상북도 청송군 진보면 신한1길 31
위치 고증 『중외일보』1928년 9월 14일자 기사에 관련 내용이 있다. 청송군 진보면 광덕리에 살고 있는 족친 권명오의 증언을 통해 위치를 확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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