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남석인 집터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의병전쟁 |
| 종류 | 가옥 |
| 상태 | 멸실 / 남석인의 집은 없어지고, 현재 다른 주택이 들어 서 있다. |
| 정의 | 산남의진에서 활약하다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한 남석인이 살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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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련 조직 | |
| 관련 인물 | |
| 관련 내용 |
남석인(南錫仁, 1878~1907, 南又八)은 경북 영양출신이다. 1905년 을사늑약 소식에 정용기(鄭鏞基)가「통유문(通諭文)」과「격려문」을 각 지역으로 보내 의병을 모집하였다. 이에 남석인은 여기에 호응하여 서종락(徐鍾洛)·남석구(南錫球)·임중호(林中虎)·심일지(沈一之)와 함께 청송지역을 담당하게 되었다. 창의준비를 마친 남석인은 정사홍·이운경(李雲景)·정천여(鄭千汝)·남석문(南錫文)과 함께 1906년 5월 5일 출전하였다. 영덕 청연사(靑蓮寺)로 이동하니 정용기의진의 중군 이한주(李漢主)가 의병 30여 명과 함께 머물고 있었다. 이들과 연합한 남석인은 포대장이 되어 5월 19일 의병 80명을 거느리고 경주로 향했다. 그러나 그날 정오 영덕 적암지(赤巖地)에 이르러 경주진위대 병정 30명의 습격을 받아 의병은 흩어지고 말았다. 그 뒤 남석인은 의진을 수습하여, 청송·흥해 등 여러 곳에서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1906년 6월 포병을 모집하기 위해 청하(淸河) 하옥계(下玉溪)에 주둔하였다가 6월 19일 적의 공격을 받아 체포되었다. 종신 징역에 처해졌으나 1907년 9월 15일 대구형무소에서 끝내 순국하였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
| 참고 문헌 |
「남우팔 등 판결문」, 대구지방법원, 1907년 9월 4일. 『山南倡義識』(하), 『한국독립운동사연구』4,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0, 566-567쪽. 김희곤 외,『청송의 독립운동사』, 청송군, 2004, 88-95·307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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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상북도 청송군 도평 |
|---|---|
| 주소 | 경북 청송군 |
| 도로명 주소 | 경상북도 청송군 현동면 도평3길 11 |
| 위치 고증 | 「남우팔 등 판결문」과『山南倡義識』(하)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후손의 증언을 통해 위치를 확정하였다. |














남우팔 등 판결문(대구지방법원, 1907년 9월 4일)
남석인 집터 전경
남석인 집터 원경
남석인 집터 우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