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곽종석 집터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국내독립운동 |
| 종류 | 가옥 |
| 상태 | 멸실 / 현재 곽종석이 살았던 가옥은 남아 있지 않으며, 그 집터는 비어져 있다. 집터의 앞에 그의 문인들이 곽종석을 기리는 비가 건립되어 있다. |
| 정의 | 1919년 3월 파리 강화회의에 보낼 파리장서의 초안을 기초한 곳으로, 유림 지도자 곽종석이 살았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1919.3 파리장서사건 |
|---|---|
| 관련 조직 | |
| 관련 인물 | 윤충하(尹忠夏)/김창숙(金昌淑)/전우(田愚)/김복한(金福漢)/임경호(林敬鎬)/손진형(孫晉衡)/신규식(申圭植)/신채호(申采浩)/김규식(金奎植) |
| 관련 내용 |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곽종석(郭鍾錫, 1846~1919)의 문인인 윤충하(尹忠夏)는 서울의 만세시위 상황과 파리 강화회의 등 국내외의 정세를 설명하고, 3·1운동에 중심적인 역할을 하지 못한 유림들이 파리 강화회의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글을 작성하고 곽종석이 대표로 나서 줄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이에 곽종석은 김창숙(金昌淑)과 상의하여 3·1운동 때 유림이 제외되어 일어난 사실을 아쉬워하며 유림이 독자적인 행동을 추진하기로 하고 파리 강화회의에 한국의 독립요구를 밝히고 독립을 청원하기로 합의했다. 파리 강화회의에 보내는 장서에는 곽종석을 대표로 영남 유림의 명망 있는 인물들이 서명했다. 김창숙이 이 장서를 해외로 가져가는 책임을 맡아 상경했을 때 호남의 전우(田愚)는 참여를 거부했으나, 호남지방의 김복한(金福漢)이 여러 선비들의 연명으로 파리 강화회의에 보낼 장서를 준비하고 있는 사실을 김복한의 제자인 임경호(林敬鎬)를 만나 확인하고 서로 공동행동을 할 것을 결의했다. 이에 양쪽에서 작성한 장서를 공동의 문서로 채택하여 137명의 유림 대표가 연명한 유림단의 '파리장서'를 김창숙이 휴대하여 국경을 넘었다. 장서의 본문은 2,674자에 이르는 한문체로서, 기초의 책임은 곽종석으로 되어 있다. 김창숙은 상하이[上海]에 도착하자 손진형(孫晉衡)·신규식(申圭植)·신채호(申采浩) 등과 상의한 끝에 이 장서를 강화회의에 파견되어 있는 김규식(金奎植)에게 우송하여 제출하게 하며, 영문번역과 국문번역을 수천 부 인쇄하여 각국대표와 외국의 공관을 비롯한 국내의 각 향교 등 여러 기관에 우송했다. 장서사건이 드러나자 여기에 서명한 곽종석을 비롯한 유림들은 일제에 의해 투옥되었으며, 곽종석은 74세의 노령에도 옥중에서 일본의 법에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포로로서 잡혀왔다는 전사(戰士)의 의지로 대응했다. 1919년 5월 20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루던 중 7월 19일 병보석으로 출감하였으나, 그해 8월 24일 사망했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 참고 문헌 |
「곽종석 공적조서」,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곽종석 등 16인 판결문」, 1919년 5월 20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8, 1976, 919~936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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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상남도 거창군 가북면 중촌리 |
|---|---|
| 주소 | 경남 거창군 가북면 중촌리 다전 2252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곽종석 등 16인 판결문」과 『독립운동사』 8권 등에 관련 사실과 당시 주소지가 기록되어 있다. 곽종석이 살았던 집터의 위치는 마을 주민을 통해 확인하였다. |














곽종석 구국문
제1차 유림단 항거 전말 문서(1919)
곽종석 집터 측면
곽종석 집터 원경
면우 곽종석 다전기적비
곽종석 집터 근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