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한상렬 집터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의병전쟁 |
| 종류 | 가옥 |
| 상태 | 멸실 / 옛 집은 사라지고 새로운 가옥이 자리하고 있다. |
| 정의 | 강원도 횡성 출신으로 의병운동을 전개한 한상렬의 집이 있던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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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련 인물 | |
| 관련 내용 |
한상렬(韓相烈, 1876~1908)은 강원도 횡성군 우천면 하수남리 출신이다. 1907년 8월 대한제국군대가 강제 해산된 후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인근의 동지를 규합하여 횡성군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민긍호의 연합의병에 합류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약 200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지평·홍천·원주·평창·영월에서 일본군과 5-6차례의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 이후 이인영·민긍호 등의 연합의병이 서울진공작전을 전개할 때에 횡성지역을 무대로 일본군과 대치함으로써 연합의병의 후미를 보호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1908년 2월에는 홍천에서 일본의 대부대와 접전을 벌여 격퇴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4월 2일 홍천 일대의 의병을 진압하고자 파견된 일본수비대에게 홍천군 월운면서북후동에서 크게 패하였다. 이 때 일본군은 한상렬을 체포하고자 그의 처자를 납치하여 귀순할 것을 종용하며 각종의 유인·협박을 가하였다. 그는 끝내 굴하지 않고 오히려 4월 20일에 김현국(金顯國), 금기철(琴基哲)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횡성수비대를 습격하여 적을 크게 놀라게 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의 반격에 밀려 횡성군 동평 방면으로 퇴각한 채 의병부대의 주전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그러나 경술국치를 앞두고 일제의 의병 탄압이 더욱 거세지면서 더이상 항쟁을 이어가기 어려운 국면에 접어들자 의병부대를 해산하고, 그 뒤 1920년 만주로 망명하였다. 그는 대한의용부·대한독립단 등 애국단체의 참모로서 조국광복을 위하여 활동하다가 1926년 9월 19일 민족진영의 분열을 책동하던 주중청년총연맹(駐中靑年總聯盟) 공산당원의 흉탄에 맞아 51세로 사망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
| 참고 문헌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1-의병항쟁사, 국가보훈처, 1970, 483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자료집』3-의병항쟁사자료집, 1971, 599-600쪽. 광복회강원도지부,『강원도항일독립운동사』1, 1991, 293-294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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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강원도 횡성군 우천면 하수남리 |
|---|---|
| 주소 | 강원도 횡성군 우천면 문암리 344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폭도사편집자료』(『독립운동사자료집』3권에 수록)에 한상렬의 본적이 횡성군 우천면 하수남리로 나타나 있으며, 그의 손자 한재욱씨(현 부론초등학교 교감)의 증언을 통해 현재 한상렬의사추모비 뒤편 골짜기에 집이 위치했음을 확인하였다. |














마을 입구에 세워진 한상렬의사추모비(2021년 촬영)
한상렬 집터(2021년 촬영)
한상렬 집터(2021년 촬영)
한상렬 집터(2021년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