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손양윤 생가 터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해외독립운동가 국내사적지 |
| 종류 | 가옥 |
| 상태 | 멸실 / 흔적을 찾아 볼 수 없으며, 현재 영화식품이라는 회사가 들어 서 있다. |
| 정의 | 국내의 광복회와 만주의 신민부 등에서 군자금 모집활동 등을 전개한 손양윤이 태어난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
|---|---|
| 관련 조직 | 광복회/신민부 |
| 관련 인물 | 박상진/신현규/이병묵/윤치백/김보연/손봉현 |
| 관련 내용 | 손양윤(孫亮尹, 1878~1940)은 박상진(朴尙鎭)이 조직한 광복회(光復會)에 가입하여 군자금 모집활동을 하다가 1917년 체포되었다. 1918년 1월 고등법원에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24년 징역 7년 11월로 감형됨에 따라 출옥하였다. 출옥후 만주 길림(吉林)으로 건너가 신민부(新民府)에 가입하였다. 이후 신현규(申鉉圭)·이병묵(李丙默) 등과 국내에 파견되어 군자금 모집활동을 하였다. 1926년 6월경부터 경남지방에서 군자금을 모집하여 5천여원의 군자금을 신민부에 전달하였으며, 일본인으로부터 현금 5백원, 엽총 2정 등을 빼앗아 활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동지 윤치백(尹致伯)·김보연(金寶淵) 등이 만주로 복귀하기 위해 돌아가던 도중 밀정의 밀고로 체포었고, 이어 손봉현(孫鳳鉉)·신현규(申鉉圭) 등이 체포되었으며, 그 역시 1928년 7월 서울에서 붙잡혔다. 그는 1929년 9월 2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무기징역을 받았으나 공소하여 12월 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20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40년 12월 중병으로 가석방되었으나 10여일 만에 순국하였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 참고 문헌 |
『동아일보』, 1928년 8월 15일, 「엽총들고 활동 3년, 신민부에 자금 조달, 변사한 신현규 관계사건」. 「손양윤 판결문」, 1929년 12월 2일,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신민부 군자금모집사건 경찰신문조서) 의견서」·「(신민부 군자금모집사건 예심신문조서) 손양윤 신문조서; 국사편찬위원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40, 1999, 150~158·188~193쪽. |
*좌표를 클릭하시면 '길찾기'로 연결됩니다.
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상북도 달성군 성북면 서변동 1132 |
|---|---|
| 주소 | 대구 북구 서변동 1132 |
| 도로명 주소 | 대구광역시 북구 망월길 23 |
| 위치 고증 | 「(신민부 군자금모집사건 예심신문조서)) 손양윤 신문조서」와 「손양윤 판결문」 및 『동아일보』 1928년 8월 15일자 등에 관련 사실과 본적지 및 당시 거주지가 기록되어 있다. 이를 바탕으로 주민 손상준의 증언을 통해 지번을 확인하였다. |














손양윤 관련기사(『동아일보』, 1929년 6월 6일)
손양윤 관련기사(『동아일보』, 1928년 8월 15일)
손양윤 생가 터 우측면
손양윤 생가 터 좌측면
손양윤 생가 터 전경
손양윤 생가 터 후면
손양윤 생가 터 원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