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별 · 작전별 사적지 현황
서상한 생가 터
기본정보
| 사적지 분류 | 국내항일운동사적지 |
|---|---|
| 운동계열분류 | 의열투쟁 |
| 종류 | 가옥 |
| 상태 | 멸실 / 현재 도로에 편입되어 옛 모습은 사라졌다. |
| 정의 | 1920년 4월 영친왕의 결혼식 때 폭탄투척을 계획하였던 서상한이 태어난 곳 |
관련정보
| 관련 사건 | 1920.4 영친왕 결혼식 폭탄투척사건(서상한의거) |
|---|---|
| 관련 조직 | 동경노동동지회/흑우회/동흥조선노동동맹 |
| 관련 인물 | 서상일(徐相日)/유진걸(柳震杰)/김낙준(金洛俊) |
| 관련 내용 |
서상한(徐相漢, 1901~1967)은 노령에서 활동하였던 서상일(徐相日)의 동생이다. 그는 1918년 대구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明治]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세이소쿠[正則]영어학교에 입학하였다. 1920년 1월 유진걸(柳震杰)·김낙준(金洛俊) 등과 동경노동동지회(東京勞動同志會)를 조직하였다. 서상한은 1920년 4월 29일에 영친왕(榮親王)과 일본 왕족인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梨本宮方子, 李方子]가 혼례를 올린다는 소식을 듣고, 이를 저지하기로 결심하였다. 우편배달부로 가장하여 가례행렬에 폭탄을 투척하고, 이어 일본 내무성과 외무성을 폭파하고,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조선총독과 이완용(李完用)을 폭살할 계획을 수립하였다. 하지만 거사준비 중 일본 경찰의 밀정이자 주오[中央]대학 학생인 신모(申某)의 밀고로 1920년 4월 11일 체포되었다. 1920년 7월 동경지방재판소에서 징역 4년형을 언도받자 공소하여 금고 4년형을 언도받았다. 출옥 후에도 재일조선인의 노동운동에 힘쓰는 한편, 무정부주의 단체인 흑우회(黑友會) 및 동흥조선노동동맹(東興朝鮮勞動同盟)과 제휴하여 활동하였다. 1936년에는 자택을 동흥조선노동동맹 사무실로 이용하도록 하였다. 서상한은 광복될 때까지 일본에 거주하면서 투옥된 독립운동가를 뒷바라지하는 등 항일민족운동을 다양하게 전개하였다. 1967년 8월 29일 도쿄[東京]에서 사망하자 재일교포들은 사회장에 준한 단체장의 예로서 장례를 치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
| 참고 문헌 |
『동아일보』, 1920년 6월 10일, 「동경의 조선인 폭탄사건, 범인은 삼상 서상한」. 『동아일보』, 1920년 6월 12일, 「서상한사건 후문, 서상한은 어떠한 인물인가, 전하를 해할 뜻은 아니라고」. 朝鮮總督府 陸地測量部, 「大邱地籍圖」, 1927(대구향토역사관 소장).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7, 1976, 408~411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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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정보
| 당시 주소 | 경상북도 대구부 서성정 15 |
|---|---|
| 주소 | 대구 중구 서성로2가 |
| 도로명 주소 | |
| 위치 고증 | 『독립운동사』 7권과 『동아일보』 1920년 6월 10일자 및 12일자 등에 관련 사실과 당시 주소지가 기록되어 있다. 1927년 발행된 「대구지적도」를 통해 위치를 확인하였다. |














서상한 의거 관련기사(『동아일보』, 1920년 6월 12일)
서상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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